입력2021.08.12 06:00 수정2021.08.12 08:27
이종관 성균관대 철학과 교수/미래인문학소셜앙트레프리네십 BK단장
테슬라, 이 무명의 자동차 회사가 어느덧 이 시대를 이끌어 가는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2009년 금융위기 이후 미래 차를 꿈꾸는 한 젊은이 정도로만 관심을 받던 테슬라의 창업자, 일론 머스크는 더 이상 몽상가가 아니다. 그는 미래 경제의 향방을 결정하는데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인공으로 떠오르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성공의 가능성에 대해 긴가 민가 하던 전기자동차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굳어지고 있다. 자동차로 20세기의 문을 연 메르세데스 벤츠, 비엠더블류, 포르세 같은 신화적인 자동차 회사들 조차 그들의 명품인 내연기관 자동차를 포기하고 전기차 제조회사로 급속히 방향을 전환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들 회사에게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거들떠 볼 필요조차 없는 애송이 자동차회사를 오히려 추종해야 하는 처지가 어쩌면 굴욕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대는 더 이상 매연을 뿜어내는 자동차를 허용하지 않는다. 나아가 전기자동차는 엄청난 제로백 성능을 과시할 뿐만 아니라 정숙성 그리고 자동차 내부 공간의 활용 면에서 내연자동차를 능가하는 압도적 우위를 자랑한다. 이제 사람들은 10년 전 전기자동차의 미래를 예언한 테슬라의 창업자를 우상화하기 시작했다. 그의 발언을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무조건 믿고 따르는 추종자들이 전 세계에 엄청난 숫자로 퍼져 있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가상화폐이다. 머스크가 어떤 종류의 가상화폐에 대해 어떻게 발언하는가에 따라 개미 투자자 혹은 투기 꾼들이 정말 개미 떼처럼 몰렸들었다 스러진다.
그런 머스크도 계속 허언을 하는 영역이 있다. 그것은 테슬라 자동차의 또다른 혁신적 기능, 즉 오토파일러이다. 머스크의 예언에 따르면, 테슬라 소유자들은 오토파일러라는 자율운전 기능으로 이미 스스로 자동차 운전을 할 필요 없어야 한다. 모든 것을 알아서 운전해주는 테슬라에 몸을 맡긴 채 테슬라 안에서 편안하게 책을 보거나, 낮잠을 즐기거나 아니면 뭐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며 이동 중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머스크의 예언은 계속 허언으로 폭로되고 있다. 왜 그럴까? 머스크의 신통력이 이제 감퇴한 것일까? 아니면 머스크는 원래 사기성이 있는 인물이기 때문 일까. 물론 이는 개인의 심성, 도덕성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함부로 이야기하면 인격모독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최근 인공지능, 그리고 자율자동차 관련 기술의 성능이 급속히 향상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원래 탁월한 기술자였던 머스크는 과학 기술에 근거한 상당한 자신감을 갖고 합리적으로 예측을 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머스크 허언의 귀책사유는 그의 인간성 보다는 다른 데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혹시 머스크를 포함한 자율자동차 관련 전문가들이 알고 있는 자율 자동차 기술에 어떤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는 것이 아닌가?
자동차가 자율적으로 운전을 하기 위해서는 인간 운전자와 마찬가지로 두뇌가 필요하다. 그리고 또 외부 상황의 정보를 인지하는 감각 및 지각 기관이 필요하다. 자율자동차의 두뇌는 인공지능이며 그것의 감각 지각 기관은 레이더나 라이더이다. 최근 인공지능과 레이더, 나아가 라이더 기술을 문자 그대로 기하급수적 발전 속도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전방위 레이더 나아가 라이더에 의해 거의 나노 초 단위로 인지되는 외부 상황 데이터는 외부 상황을 물 샐 틈 없이 완벽하게 인지하는 수준을 향해 발전하고 있다. 또 이렇게 인지된 거의 무한량에 가까운 빅데이터를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처리하여 상황에 최적화된 판단을 내리는 딥러닝의 성능이 경이로운 수준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최첨단 라이더와 인공지능이 대체 백치 같은 실수를 저지르며 인간의 목숨까지 희생시키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이제는 너무도 잘 알려진 사례들이지만, 테슬러의 자율자동차는 밤하늘에 뜬 달과 노란 신호등을 구별하지 못하는 백치 같은 행동을 한다. 대체 왜 그럴까? 이 문제는 라이더의 성능이 급속히 증강되어 정말 외부 상황이 무한량의 데이터로 입력된다면 해결 될까. 또 그것을 현재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딥러닝 인공지능의 파라미터 개수가 인간의 두뇌 뉴런의 숫자를 능가하는 10조개 정도로 거대화되어 그 무한량을 데이터를 처리하면 해결될 것인가? 물론 이렇게 믿는 인공지능 전문가들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회의적인 전문가들도 상당수이다. 그런데 회의적인 입장의 근거는 무엇인가? 대개의 경우 인공지능이 상식이 없어서 그렇다고 한다. 그러나 상식을 근거로 인공지능의 백치 성능을 설명하는 것은 그야말로 피상적이다. 상식이 무엇인지 상식적으로 규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백치같은 행태를 보이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데 그 이유가 있다. 왜 인공지능은 달과 노란 신호등을 구별하지 못할까?
사실 인공지능은 굳이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것을 물리적이고 또 이 물리적인 것은 숫자로 변환될 수 있다는 가정 아래 작동한다. 즉 인공지능에게 노란 신호등과 밤하늘의 달은 다 발광체이고 이 발광체는 거기서 발원하는 광선의 주파수에 따라 수치화되며 이렇게 수치화되는 데이터만을 인공지능이 처리한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인공지능은 물리학과 수학만을 아는 외계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물리학과 수학만을 아는 외계인들은 지구에 도착하여 고딕성당을 보면, 어떻게 될까? 이 외계인들에게 고딕성당은 물리적으로 어떤 물질로 구성된, 그리고 수학적으로 측정되는 어떤 높이와 넓이를 갖는 거대한 물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따라서 이 외계인들에게는 고딕성당과 그 고딕성당만큼의 높이와 넓이를 갖는 돌덩어리는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설령 그 외계인들이 최첨단의 양자역학을 동원해서 고딕성당을 극도로 세밀하게 분석한다해도, 그 미시물리적 분석만을 통해서는 결코 고딕 성당은 고딕성당으로 인지되지 않는다. 여전히 원자로 구성된 돌덩어리일 뿐이다. 따라서 이 외계인들에게 고딕성당이나 돌덩어리는 동일한 관계 속에서 동일하게 취급된다. 다시 말해서 이들 외계인들은 고딕 성당에 대한 역사적, 문화적 이해능력이 없는 것이다.
인공지능이 달과 노란색 신호등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달은 천체물리학적 현상이지만, 노란색의 신호등은 그런 물리학적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의미 현상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물리적으로 간주하고 또 그것을 숫자로 변환하는 전처리(pre-processing)작업이 선행돼야만 하는 인공지능에게 이런 구별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앞으로 인공지능이 진정 완전 자율자동차를 운행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려면, 바로 문화 사회적 인지능력을 가져야 한다. 현재의 딥러닝은 위상학적으로 인간의 3차원 인지 능력을 천문학적 수준으로 능가하는 N차원의 함수계산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아무리 미래의 인공지능이 위상학적으로 수천만차원의 함수 계산능력을 발휘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물리- 수리적 처리능력이라면, 물리 현상과 역사 문화적 현상을 구별하여 분별력 있는 판단을 내리는 데는 실패할 것이다. 때문에 현재 딥러닝의 한계를 돌파하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화두는 다음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어떻게 인공지능에게 문화적 인지능력을 구현해야 하는가? 이 화두를 해결하는 지혜가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기를 바란다.
입력2021.07.14 23:17 수정2021.08.12 02:30
이종관 성균관대 철학과 /미래인문학소셜앙트레프레네십 BK 사업단장
1. 인공지능과 인간
미래의 문명은 인공지능이 없으면 오지 않는다. 이 전망은 이 시대의 가장 확실한 통념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최고 성능의 인공지능을 개발하기 위한 과학기술자들의 매진은 진정 찬사를 받을 만하다. 인공지능은 2차세계 대전 이후 개발이 본격화되었고 또 오늘에 이르기까지 몇번의 좌절을 겪었다. 초기 규칙기반 기호처리 패러다임을 따라 발전하던 인공지능은 70년대 들어 한계에 봉착했다. 그러나 두뇌의 작동원리에 착안한 신경망 패러다임으로 전환한 이후 과학기술자들의 지난한 노력으로 최근 놀라운 학습능력을 보여주는 경이로운 성능의 인공지능 GPT3를 성취하였다. 하지만 이 성능 증강에 매진하는 눈물겨운 노력에서 정말 물어져야 할 근본적인 질문들이 묻혀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어쩌면 가장 중요한 질문, 즉 인공지능과 인간이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이 질문은 사실 인공지능은 인간과 구별되는가 또 구별된다면 어떻게 구별되는가 등의 문제를 내포한다. 그리고 나아가 최근 관심이 되고 있는 자율자동차의 경우는 자율자동차가 사고를 일으켰을 때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도 연관된다. 만일 자율자동차가 진정 자율적이라면, 인간과 같은 도덕적 책임의 주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골치 아픈 철학적 논의를 요구하지만 AI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2. 튜링의 화두
인간과 인공지능은 어떤 관계를 가져야하는가? 이 문제를 촉발시킨 사람은 컴퓨터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알랭튜링이다. 튜링은 기계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실험을 고안하였다. 그런데 이 실험으로부터 인간의 인간성을 구성하는 핵심이 생각이라면, 생각하는 기계와 인간의 관계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와 동일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런데 대체 튜링테스트는 무엇인가? 튜링테스트는 인공지능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잘 알고 있을 테지만, 그 핵심내용을 다시 한번 상기해보자.
튜링 테스트는 다음과 같이 실행된다, 불투명한 막을 가운데에 두고 한쪽에는 인간과 생각하는 기계(AI)를, 다른 한쪽에는 피험자를 앉힌다. 이 피험자는 반대편의 인간과 생각하는 기계를 볼 수 없는데, 각각과 대화를 통해 둘 중 누가 인간이고 누가 기계인지 구분해야 하는 테스트를 받는다. 테스트 결과 피험자가 누가 인간이고 누가 기계인지 구별해내지 못한다면 기계가 인간과 같은 지능을 구현해낸 것이다. 사실 오늘날 일론 머스크가 주도하는 오픈 AI가 지난해 개발한 GPT3와 같은 거대AI는 튜링테스트를 통과한 듯 보인다. GPT3는 시와 논문으로 보이는 단어와 문장을 조합해내는 능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AI가 인간들이 시로 간주하는 글자들을 조합해낸다는 점에서 인간과 같은 창의적 AI가 탄생했다고 해야 할 것인가?
물론 철학계에서는 튜링테스트를 둘러싸고 존 설이란 철학자의 중국어방 논증 등 많은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 논란은 철학자 사유가 아니라 엄청나게 복잡한 논리의 함정에 빠진 지적 혼란에 다름아니다. 이 혼란은 튜링테스트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다시 보면 간단하게 종식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반려견을 피험자로 하는 튜링테스트를 설계하여 실험해보자. 즉 동물 개와 로봇 개를 놓고 함께 지내도록 해보자. 이때 동물 개가 로봇 개를 실재의 개로 인식하는 행동을 보인다면? 튜링테스트의 논리를 따른다면 실재의 개가 로봇 개를 실재 개와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로봇 개는 실재 개와 같은 동물성을 구현한 것이라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주장인가. 실재의 개가 로봇 개를 살아있는 개와 구별하지 못하는 행동을 보이는 경우, 우리는 로봇 개를 진짜 개와 동일시한 그 개가 지능이 낮아 오인한 것이라고 판정한다. 인간에게 튜링테스트를 적용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앞서 개에게 적용한 튜링테스트에서 개가 로봇 개와 진짜 개를 구별하지 못한 것이 오인에 불과한 것처럼, 인간이 AI와 인간을 구별하지 못했다고 해서 AI가 생각이라는 인간의 능력을 구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오인일 뿐이다.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튜링테스트는 AI와 인간을 같은 것으로 착각하는 인지적 오인으로부터 AI와 인간의 존재를 동일시하는 존재론적 결론을 추론하는 오류이다.
3. AI: 물체? 기계? 동물? 인간?
하지만 오늘날 인간을 통해 AI를 이해하거나 반대로 AI를 통해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어지러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인간과 AI 그리고 이 둘이 물체나 기계, 동물과 어떻게 구분되지는 명확히 하는 존재론적 연구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이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맺어져야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을 하나로 동일화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가령 인간을 기계와 구별하지 못하면, 인간을 기계로 취급하거나 기계를 인간으로 의인화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물리적, 물질적으로 설명하는 물리주의가 요즘의 대세이다. 즉 모든 것의 존재방식은 물리적, 물질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예를 들어 바위 위에 도마뱀이 앉아있는 경우를 보자. 제3의 관찰자의 입장에 보면, 바위나 도마뱀은 똑 같은 공간적 위치에 존재한다. 그러나 물체인 바위는 스스로 운동해서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중력과 같은 외부의 원인에 의해 그곳에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을 타성운동이라 한다. 반면에 생명체인 도마뱀은 스스로 바위 위에 올라가 자리 잡았다. (예를 들면 ‘살아남기 위해서 햇빛에 따뜻해진 바위를 찾아갔다.’) 즉 생존 충동에 따라 행동했다. 바위와 도마뱀이라는 두 존재자는 동일한 이 위치에 존재하지만 그 위치에 존재하는 근거와 원리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기계와 물체 그리고 생명체를 구별하는 것도 중요하다. 데카르트 같은 철학자조차 동물을 기계와 동일시했고 또 그의 제자인 라메트리는 심지어 인간을 기계와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계는 물체와 달리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설계되었으며, 설계에 따라 배치된 부품들이 체계적으로 작동한다. 물체는 외부원인에 의해 ‘운동’하고 동물은 생존충동에 따라 ‘행동’하며 기계는 설계된대로 ‘작동’ 한다. 그리고 물체는 ‘공간’에서 운동하고, 동물은 ‘환경’에서 생존하지만, 기계는 ‘공장’에서만 작동한다. 기계는 공간이나 환경에 있으면 그저 고철덩어리라는 물체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AI에 대해 생각해보자. AI는 초기에는 기계의 원리를 지능적으로 구현해내는 것으로 이해되었으나, 최근에는 생명체인 인간의 지능의 원리를 응용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 숨어있는 기본 전제는 다음과 같다: 인간은 동물에 속하고, 딥러닝 같은 AI는 인간의 두뇌를 모방한 것이므로 사실상 AI의 존재방식은 동물의 그것과 같다. 과연 그럴까?
첨단 AI는 기계이지만, 그 자체의 지능을 구현하였다는 점에서 타의에 의해 작동되는 기계와는 다르다. 그렇다면 AI는 동물, 혹은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AI는 두뇌를 모방하였으나 이는 생명의 지능적 두뇌 활동과 분명히 구별된다. 인간을 비롯한 동물의 두뇌는 뉴런의 전기적 신호를 통해 생화학적으로 작용한다. 반면 AI는 인간의 뉴런을 모델링했으나 수리적인 함수를 통해 작동한다. 딥러닝은 두뇌의 기본적인 구조만 모델링했을 뿐 사실 실질적인 정보 처리는 계산적이고 수리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딥러닝은 사물들을 분류하거나 어떤 추세를 파악하여 미래를 예측한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할 때에는AI는 선형회귀 함수 혹은 시그모드 함수 등을 통해 작동하도록 프로그램화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의 두뇌나 동물의 뇌는 그러한 고도의 수리적 처리방식이 생물학적 능력으로 내재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와 AI가 하는 기본적인 활동의 원리는 동일화될 수 없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인간과 동물의 구분은 가능할까? 물론 진화론의 관점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행동 원리가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과 동물은 그 존재를 존속해가는 방식에 있어 분명히 다르다. 동물의 존속은 곧 ‘생존’이다. 동물의 생존은 잘 질서지어진 생존충동에 의해 최적화된 환경에서 이루어지며, 이때 동물에게 생존 외의 가치는 중요하지 않다.
동물은 자신이 처한 환경 속에서 생존충동에 따라 죽기 전까지 삶을 연장한다. 반면 인간은 자신이 추구하는 의미를 위해 살아가고, 그 의미를 실현하기 위한 터를 찾으며 미래를 향해 행위한다. 즉 인간은 단순히 생존하거나 작동하는 존재가 아니라 삶에 대해 고민하면서 미래를 지향하는 존재이다. 우리(인간)는 각자가 원하는 바와 삶의 의미가 분명하다면 힘든 일이 닥쳐도 견뎌내는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삶의 의미가 불분명하다면 아무리 풍요롭고 좋은 생존 조건에 있어도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이는 생존하기에 좋은 조건만 있으면 그 조건에 최적화된 충동적 행동으로 생존하는 동물과 비교되는 인간의 독특한 존재방식이다. 인간에게 생존은 필수적이지만 생존이 인간을 살게 하는 최우선의 방식은 아니다. 때로는 생존의 위험을 감수하고 안온을 포기하며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의미나 가치를 향해 살아간다. 그렇기에 인간은 생존에 최적화된 환경이 아닌 자신이 선택한 풍경 속에서 서식이 아닌 처신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며, 자신이 놓인 조건에 스스로 택한 태도를 취하며 삶의 의미를 만들어간다.
이제까지 한 이야기를 정리해보자. 물체는 중력과 같은 외부 압력이나 질량 분포에 의해 운동하거나 정지하기 때문에 공간에 존재한다. 기계는 목적에 맞게 설계된 부품들이 체계적 작동하며 공장에서만 기계로 존재한다. AI는 무한에 가까운 반복 함수 연산에 따른 예측, 분류, 군집 및 시뮬레이션 작업을 하며 따라서 N차원 좌표계에 존재한다. 동물은 생존하기 위해 생존 충동에 따른 행동을 하며 주어진 수명까지 환경에 서식한다. 이에 반해 인간은 실존한다. 실존이란 의미를 추구하며 미래를 향해 살아가는 존재방식이다.
4. 미래 인간과 AI의 관계는 어떻게 설계되어야 하는가?
인간은 삶의 의미를 탐구하며 미래를 향해 실존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 행위인 일(work)도 생존 충동에 의한 행동이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실존 활동이다. 인간은 항상 미래를 향해서 삶을 살아가며 일은 이렇게 미래를 향해 사는 인간 삶을 실질적으로 실현시키는 활동이다. 그리고 인간은 일을 통해 삶의 의미와 지혜를 터득하고 체득한다. 따라서 일은 의미가 충만한 삶, 즉 well-being의 조건이 된다. 일은 인간 삶이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 필수 조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일은 결코 포기될 수 없는 인권에 속한다. 이렇게 인간이 일을 하면서 사는 이유와 목적 그리고 방식은 기계의 작동, 동물의 본능적 생존 행동, AI의 여러가지 함수 모델링을 통한 파라미터의 최적화과정과는 다른 것이다.
현재 AI는 지능 증강을 목적으로 인간의 노동을 효율성 측면에서 능가하는 완전자동화를 향해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 완전자동화는 공장을 무인화하는 혁신이다. 하지만 미래 AI와 인간이 바람직한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는 무인화보다는 실존하는 인간 활동으로서 일하는 인간을 배려하고, 인간들 사이의 소통과 이익 조정 등 사회적 관계를 융화 시키는 데 집중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일은 삶의 의미를 터득해가는 인간의 실존활동이지만, 일과 인간이 잘못 관계를 맺어버리면 노역이 된다. 이 대표적인 사례가 과거의 노예들의 일이다. 따라서 인간과 일이 올바른 관계를 맺고, 조화를 이루도록 조력자 역할을 하는 것이 AI가 수행하는 기능이 되어야 한다. 즉, 인간의 일을 완전히 대체하는 로봇보다는, 인간의 일이 너무 과도하여 ‘노역’이 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조력자의 역할을 하는 협력 로봇, 즉 ‘Cobot’이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로봇 혹은 AI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대체해서는 안 될 것이다. AI는 실존하는 인간들이 서로 소통하고, 배려하며, 사회적 관계를 맺을 여지를 여는 방식으로 개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인간이 배려, 존중 등의 윤리적 덕목을 몸소 터득하여, 실천할 기회를 박탈당하게 된다. 올해 초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이루다’ 사태가 좋은 교훈이다. 이루다 사태는 AI가 인간 간의 관계를 대체하려고 할 때, 어떤 변태적인 사회적 관계가 출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사전 경고 였다. 이러한 교훈을 현명하게 반영할 수 있는 AI는 과연 어떤 패러다임을 따라야 할까? 딥러닝일까 아니면 새로운 AI의 패러다임이 개발되어야 할까? 이에 대한 한국AI 연구자들의 과감한 시도를 기대해 본다.
입력2021.06.17 00:22 수정2021.08.12 02:22
이종관 성균관대 철학과 교수/ 미래인문학과 소셜앙트레프레네십 BK 사업단장
1.왜 5차산업 혁명인가
어느 덧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준비해야 하는 국면이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다가오는 미래는 5차산업혁명으로 진행되어야 하고 AI는 이 5차산업혁명을 위해 혁신적으로 개발되어야 한다. 4차산업혁명이 시작된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5차산업혁명인가. 사실 5차산업혁명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진정 포스트코로나 시대로 가기 위해서는, 4차산업혁명의 연장이나 가속적 성장이 아니라 4차산업혁명을 넘어서는 심층적 혁신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언제부터인가 산업혁명을 1차에서 4차까지 구분하는 것이 시대의 통념이 되었지만, 사실 1차에서 4차산업혁명까지 그 기저에 있어서는 전혀 변화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차산업혁명이란 메가트렌드에 가려진 경제구조를 잘 살펴보면, 1차에서 4차까지 그 변혁을 관통하며 오히려 강화된 상태로 자리잡고 있는 경제구조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바로 선형경제(Linear Economy)이다. 근대 산업혁명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경제는 사실상 선형경제라는 점에서 혁신도 혁명도 없다. 다만 선형경제를 성장시키는 기술이 더욱 고효율화되고 지능화되고 있을 뿐이다.
2. 4차산업혁명: 스마트선형경제의 급팽창과 온토신데믹
선형 경제의 작동 양상은 다음과 같다. 자연의 모든 것은 자원으로만 존재하며 따라서, 자연으로부터 최대한 효율적으로 자원이 채굴된다, 그러나 자원은 상품으로 제조될 때만 존재가치가 있다. 그리고 제조된 상품은 인간에 의해 소비됨으로써만 존재가치를 실현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소비자로서 활동하도록 유혹받으며, 제품을 소유하고 소모하여 결국 폐기물을 양산해 낸다. 이제 이 선형경제는 디지털전환을 가속화하는 4차산업혁명을 통해 스마트 선형경제로 변신하여 초고속으로 천문학적 규모의 폐기물 양산 문명으로 급팽창하고 있다. 이는 기후위기로 치달아 인간의 세계와 동물의 환경이 뒤섞이는 존재론적 혼돈으로 귀착된다. 이 존재론적 혼돈은 다시 새로운 인수공통 감염병으로 발병하여 인간의 전지구적 이동을 통해 증폭됨으로써 팬데믹이 창궐한다. 팬데믹은 현대인의 삶과 생명체의 삶 전반을 파멸로 몰아넣는 상황이다. 따라서 스마트선형경제는 선형경제의 작동을 마비시키는 역습으로 되돌아 오고 선형경제의 굴레 안에서 그 경제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인간들의 경제생활 자체를 위기에 몰아넣는다. 코로나 팬더믹은 보건이나 의료영역의 문제가 아니라 기후, 경제, 생명 공동체 전반의 존재론적 파멸의 상황으로 비화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코로나 팬데믹은 “복합적인 존재론적 위기”(Onto-Syndemic)라 해야 할 것이다.
3. 5차산업혁명: 메타버스와 스마트순환경제 그리고 AI
이 온토신데믹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물론 요즘 한창 회자되고 있는 ESG는 어쩌면 이 온토신테믹의 긴급 처방으로 유효할 지 모른다. 그러나 그 ESG를 주축으로 한 새로운 미래가 다가오기 위해서는 4차산업혁명이 급팽창시킨 스마트선형경제를 심층적으로 혁신하는 새로운 산업혁명이 절실하다. 그렇다고 4차산업혁명과는 완전히 다른 기술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긴박하게 요청되는 것은 4차산업혁명의 기반기술을 적용하는 방향을 전환하는 생각의 혁신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미래는 초과잉소비와 폐기물 양산으로 성장하는 선형경제를 극복할 수 있다. 즉 AI에 의해 조율되는 ‘비물질적 창조감상경제’와 ‘스마트선형경제’가 연동되는 새로운 산업혁명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사실 현재 메타버스라는 디지털공간에서 일어나는 MZ세대의 경제활동을 보면, 어떤 물질적 상품이 생산 소비 소모 그리고 폐기되는 것이 아니다. 메타버스에서 참여하고 있는 미래세대들의 경제활동은 디지털 캐릭터, 웹툰, 디지털 드라마, 디지털 음원과 같은 비물질적 디지털 콘텐츠가 구매 소비되고 있다. 그런데 이 메타버스에서 소비되는 디지털 콘텐츠는 어떤 물리적 기능이 구매되고 사용되어 소멸됨으로써 결국 폐기되는 과정 속에 있지 않다. 비물질적인 디지털 콘텐츠를 구매하는 소비자는 그 콘텐츠에서 어떤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고 그에 공감하는 일종의 감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물질을 가상화하는 디지털 기술의 기능에는 인간을 물질세계로부터 탈출시켜 비물질 세계로 진입시킬 수 있는 중요한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 그리고 이를 잘 활용하면 모두가 감상자이자 창작자가 되어 경제활동을 하는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즉, ‘물질 과잉 소비 소모경제(Material hyper production&Consumption Economy)’로부터 ‘비물질적 창조감상경제(Mental Creation&Appreciation Economy)’로 전환이 가능하다. 예를 들면, 지금까지 음악 작곡은 고도의 악기 연주 실력이 있어야 가능했으나, 앞으로는 떠올린 멜로디를 휘파람이나 음성으로 표현해 내어 녹음하면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악보화되고, 또 원하는 악기로 연주된다. 개인들이 악기를 잘 다루지 못하더라도 메타버스에서는 그것을 음악으로 연주해낼 수 있는 AI가 기술적인 조력자 역할을 하게 된다.
이렇게 메타버스에서 AI를 잘 활용하면, 모든 인간이 모든 인간에 대해 생산자와 소비자가 아니라 창작자와 감상자가 됨으로써 활성화되는 경제활동이 실현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물질과잉생산소비경제를 메타버스라는 비물질적 시장을 통해 비물질적 창조감상경제로 전환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경쟁이 아니라 공감이 경제활동의 기초가 된다. 또 공감은 공동체 의식으로 고양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공감이 기초되는 경제는 예술적 창의력이 활성화되는 공동체 경제로 고양될 수 있다. 인간의 창조적 예술 활동은 인간 간의 공감을 이루어내는 중요한 사회문화적 활동이며, 따라서 예술 활동은 공감을 통한 사회문화적 공동체의 형성에 지대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4. 미래의 AI: 메타버스와 스마트순환경제를 연동시키는 AI의 개발
이렇게 메타버스의 비물질적 경제활동은 공감을 거쳐 사회적 가치 창조 능력인 공동체 의식으로 고양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복합적 존재론적 위기의 병인이 되는 스마트선형경제를 스마트순환경제로 전환시킬 수 있는 공동체적 책임감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 전환에서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극정밀 추적 감시를 통해 축적되는 빅데이터와 AI처리 능력을 지금까지와는 달리 역적용시키는 방식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제품의 생산과정과 소비과정을 총체적으로 추적하여 빅데이터를 구축하고 AI를 통해 수요 공급을 실시간으로 파악하여 일치시키는 플랫폼이 구축될 수 있다. 이는 어떤 소비자에게 불필요해진 제품을 회수하는 스마트역물류시스템으로 또 나아가 그 제품을 재활용하거나 거기서 다른 가치를 창조하는 다른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가치 재창조 순환물류시스템으로 작동한다. 이렇게 빅데이터와 AI 처리기술을 다른 방향으로 적용시키면,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모든 제품으로부터 또 다른 가치를 발견하여 그 가치를 다시 창조해내는 경제 시스템인 스마트 순환 경제를 이룰 수 있다. 이러한 기제들을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디지털 인프라 기술은 ‘Cyber Physical Systems-cross-industry collaboration, Sensoring, Intelligent market and logistics platform, the Internet of Things’ 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총괄 조율하고 메타버스와 연동시켜 스마트순환경제로 전환시키는 역할은 바로 미래의 AI가 해야 하는 것이다.
이번 코로나 위기를 겪으면서 우리나라는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섰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진정한 선진국은 인류의 역사를 더 높은 가치를 향한 미래로 선도하는 나라이다. 이제 우리나라는 4차산업혁명을 넘어 스마트순환경제로 향하는 5차산업혁명의 선구자 역할을 해야하지 않을까. 이를 위해서는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자들은 스마트 순환경제와 메타버스를 연동시키는 AI의 개발을 향해 담대한 연구에 도전해야 하지 않을까
지난 호에서 4차산업혁명에 잠복하고 있는 대재앙의 리스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5차산업혁명이라 불릴 수 있는 새로운 혁신이 절실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 핵심은 디지털 스마트 기술을 역적용시켜 1차에서부터 4차 산업혁명을 관통하는 선형경제를 메타버스와 스마트순환경제가 연동된 매타버큘러노미로 혁신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혁신을 누가 이뤄내야 할까? 과연 이러한 대혁신에 감히 도전할 존재가 있을까? 대혁신의 주인공은 바로 로봇도, 인공지능도, 포스트 휴먼도 아니다. 바로 인간이다. 인간만이 미래를 향해 결단할 수 있는 자유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빅터 프랑클의 고백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유태인 출신의 신경 생리학자였다. 그는 유태인이었기에 그이 부모, 친척, 그리고 심지어 갓 결혼한 그의 부인과 함께 나치정권 이후 수용소에 수감된다. 그러나 그 수용소에서 그를 제외한 그의 부인, 가족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 그는 그가 참혹한 바탕으로 인간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인간은 조건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그 조건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결단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이다”
이 말은 두 가지의 측면에서 중요하다. 우선 그가 통찰하여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단순히 실험실에서 나온 결과도, 논리적 추론의 결과도 아니다. 그는 생생한 역사적 현실에 처하여 그 상황을 직접 겪으며 몸으로 깨달은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포로 수용소에서 인간으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하였다. 심지어는 자기의 몸 조차 자신이 것이 아니라 나치의 소유물로 빼앗길 수 있음을 체험하였다. 하지만, 그는 또 다음가 같은 사실도 목격하고 체험하였다. 즉, 인간의 마지막 자유, 즉 주어진 환경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선택하는 자유, 그것은 나치조차 빼앗을 수 없었다. 실로 나치가 지배하던 그 시대에 유태인으로 태어난 것은 그 유태인들이 선택할 수 없었던 불행한 조건이다. 그런데 프랑클은 유태인 수용소에서 인간은 두 종류의 인간, 즉 돼지 혹은 성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목격했다. 그런데 이들을 돼지와 성자로 만든 것은 유태인 수용소가 아닌 그들이 추구하는 삶의 의미에 따른 그들의 결단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몸까지 뺴앗긴 그 상황에서도 타인을 배려하고 희생하는 성자가 되는 반면, 어떤 사람은 그 똑 같은 상황에서 인간이기를 보포기하고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프랑클이 그 참혹한 나치수용소에 체험하고 깨달은 진리는 오늘날의 상황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지금 현재 코로나는 어떻게 보면 끔찍한 재앙 속에 살고 있다. 이는 우리가 스스로 선택한 역사적 상황이 아니다. 그러나 이 현실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바로 우리의 선택이다. 누차 강조했듯이 우리가 디지털 전환을 선형소비경제를 지능화하는 기존의 방향으로만 계속 발전시킨다면 우리에게 닥쳐올지 모르는 재앙의 리스크가 점점 커질 것이다. 따라서 빠르게 디지털 기술을 역적용시키는 방향으로 경제를 혁신해야 하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경제로 나아갈 수 있는 탈출구를 열 수 있게 된다. 이때 바로 우리의 선택이 지극히 중요하다
이러한 선택을 한 사람들은 이미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스마트 순환경제의 첫 발을 디딘 업체가 ‘당근마켓’이다. 당근마켓은 디지털 기술을 역적용하여 디지털 기술이 파괴한 것을 회복시키는 비즈니스 모델이다. 잘 알다시피 디지털 기술은 전세계를 하나로 묶는 세게화을 이룩하였는데 이는 동시에 지역사회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당근마켓은 당근마켓은 디지털 기술을 역이용하여 “당신 근처를 연결시킴으로써 지역 커뮤니티를 소생시켰다. 그리고 자칫 폐기될 물품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순환 경제를 스마트하고 지능적으로 증진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사업모델의 효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2020년 한 해 동안 1억 2000만 건의 거래와 나눔이 당근마켓을 통해 성사되었는데 이렇게 재사용된 자원의 가치는 나무 2770만 그루를 심은 것과 같으며 서울의 남산 수십 개가 온실가스를 흡수한 것과 같은 효과를 지닌다.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슈퍼빈(Superbin)이라는 스타트업이다. 이 슈퍼빈은 우리의 경제가 나아가야 될 방향이 스마트 순환 경제라고 하는 것을 통찰하고, 인공지능 기술과 네트워크 기술, 빅데이터 기술을 융합시켜 페트병을 끊임없이 회수해서 재활용하는 효율적으로 지능화된 시스템을 구축했다. 최근에는 수퍼빈은 화성에 재활용 공장을 설립 중에 있다. 그런데 이 공장은 문화시설 개념으로 디자인되어 순환경제 과정을 모두가 볼 수 있게 하고 동시에 참여를 증진시키는 갤러리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또 다른 예시로 네덜란드의 트리오도스(Triodos) 은행도 있다. 이 은행은 시장에서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그리고 생태적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자본을 조성하고 투자는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최근 유럽의 젊은이들은 이러한 사회적 금융을 핀테크로 스마트화하는 소셜핀테크에 도전하고 있다. 비록 우리나라의 경우 이러한 소셜 핀테크가 발전하진 않았지만, 그 잠재력이 충분하다. 바로 ‘돈쭐’ 문화이다. 돈쭐은 선행을 하는 자영업자에게 온라인으로 주문 폭탄을 날려 그 자영업자에게 경제적 이익을 제공하는 행위이다. 비록 돈쭐이 즉흥적인 놀이 형태로 진행되고 있지만, 이를 비지니스 모델과 결부하여 핀테크와 결합한다면 우리도 사회적 핀테크를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스마트 순환경제는 기업의 생존을 위해서도 하지 않으면 않되는 당위로 다가오고 있다. 스마트 순환 경제는 경제 기관의 예측에 따르면 2030년에는 4500조 원의 시장으로 성장을 할 것이라고 한다. 또 앞으로 10년간 선형 경제에만 계속 매달려 있는 기업들은 거의 40%가 파산할 것이라고 예측이 있다.
물론 5차산업혁명의 미래를 향한 도정에 선구적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대학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지금까지 대학이 교육과정은 선형경제에 최적화된 인재를 양성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앞으로 대학은 스마트순환경제를 메타버스 비물질 경제와 연동시켜, 공감과 공동체의 책임의식, 사회적 가치, 생태가치를 창조하는 5차산업 혁명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 이미 해외의 몇몇 대학에서는 사회적 가치와 생태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인재의 양성을 교육과 연구의 목적으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교육과정은 물론 교육공간의 구조까지 대대적으로 혁신하였다. 그 대표적인 대학이 영국의 North Hampton 대학이다.
지금까지 4회에 걸쳐 현재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역사적 대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철학적 미래의 비전을 그려보았다. 그동안 다소 어려울 수도 있는 이 철학 컬럼을 읽어주신 동문들께 감사를 드리며 다음과 같은 말로 컬럼의 끝을 맺는다.
현재는 미래를 혁신할 수 없다.
그러나 미래를 바라보는 현재의 눈이 혁신될 때,
혁신적 미래는 다가온다.
1. 5차산업 혁명, 어떤 기술이 필요한가?
지난 호에서 4차산업혁명은 사실상 폐기물 양산 시스템인 선형경제를 스마트화하지능화하는 혁명에 다름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다. 스마트 선형경제가 스마트 순환경제로 혁신되지 않으면, 인류의 역사는 대재앙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른바 6차대멸종이 그것이다. 그런데 4차산업혁명을 5차산업혁명으로 혁신하고 순환경제가 추구하는 목적이 효율적으로 현실화되고 인간의 정체성이 새롭게 구성되는 도시 경제를 실현시킬 수 있는 기술은 무엇일까? 이제까지는 존재하지 않던 기술이 하늘에서 떨어지듯 그렇게 출현해야 할까? 아니다. 그 기술은 바로 현재 선형경제를 고효율화 지능화하여 페기물을 천문학적 규모로 양산하는 4차산업혁명의 기반기술에 잠재하고 있다. 바로 디지털 기술이다.
디지털 기술의 가상화 비물질화 능력과 디지털 기술의 극 정밀 추적 감시로 생성되는 빅데이터와 이를 AI를 통해 처리하는 능력을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적용해보자. 그러면 4차산업혁명에 의해 급팽창하고 있는 스마트선형경제의 굴레를 탈출할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될 수 있다. 그리고 이 통로는 1차에서 4차에 이르는 산업혁명과는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와 방향성이 다른 혁명이 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혁명은 5차산업혁명이라고 불릴 자격이 차고도 넘친다.
2. 디지털기술에 대한 재성찰
이제 4차산업혁명의 기반기술인 디지털기술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해 그 기술을 다시 살펴보자.
이 기술은 모든 것을 디지털화 시키며 가상화된 현실로 구현한다. 디지털 기술의 가상화 능력은 비물질화 나아가 탈물질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물질 과잉 생산 소비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된다. 특히 현재 MZ세대의 놀이터인 메타버스라는 디지털공간에서 일어나는 경제활동을 잘 살펴보면 이 기회가 포착된다. 코로나 이후 인간의 일상생활이 디지털공간으로 도피함에 따라 메타버스에 대한 관심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고 메타버스를 둘러싸고 엄청난 담론이 폭증하고 있다. 이 담론은 메타버스라는 용어의 어원에서부터 메타버스를 구성하는 각종 기술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 그 내용이 각 논자들에게서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을 만큼 정형화되어 가고 있다.
이제는 누구에게나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메타버스란 용어는 1992년 스노우 크래시에 의해 창시되었다. Beamable의 설립자인 Jon Radoff는 메타버스의 7가지 차원을 제안한다. 경험, 발견, 창조 경제, 공간 컴퓨팅, 분산, 인간과 컴퓨터의 상호작용, 그리고 디지털 인프라가 그것이다. 최근 '메타버스'는 투자계로부터 황금알을 낳을 수 있는 유망한 투자 테마로 여겨지며 디지털 경제 혁신과 산업 사슬의 새로운 개척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폭증하는 메타버스 담론에서 그 메타버스에서 일어나는 경제활동의 중요한 특성이 간과되는 아쉬움이 있다.
3. 메타버스와 생성AI에 숨겨진 대전환의 가능성
메타버스라는 디지털공간에서 일어나는 경제활동은 기존 경제활동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메타버스에서는 어떤 물질적 상품이 생산 소비되고 소모되는 것이 아니다. 메타버스에서 참여하고 있는 미래세대들의 경제활동은 디지털 캐랙터, 아바타, 디지털 음원, 웹툰, 디지털 드라마와 같은 디지털 콘텐츠의 생산과 구매 그리고 소비로 이루어 진다. 그런데 이 메타버스에서 소비되는 디지털 콘텐츠는 어떤 물리적 기능이 구매되고 사용되어 소멸됨으로써 결국 폐기되는 과정 속에 있지 않다. 디지털 콘텐츠를 구매하는 소비자는 어떤 물리적 기능 갖고 소유 가치를 제공하는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콘텐츠에서 물리적 소유가치와는 다른 비물질적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고 그에 감응하는 일종의 감상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물질을 가상화하는 디지털 기술의 기능에는 인간을 물질세계로부터 탈출시켜 비물질 세계로 진입시킬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기능이 잠재되어 있다. 그리고 이렇게 비물질화된 경제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메타버스에서는 모두가 감상자이자 창작자가 되어 경제활동을 하는 미래가 암시되고 있다.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그것을 통해 형성된 메타버스에서 우리는 자신만의 역량을 선보일 수 있는 무대를 누구나 갖게 되었다. 최근에는 다양한 앱과 인공지능 도구를 잘 활용한다면 누구나 창작활동을 하며 크리에이터가 될 수 있는 장이 열렸다. 예컨대 이전의 음악 작곡은 고도의 악기 연주 실력이 있어야 가능했으나 현재는 떠올린 멜로디를 휘파람이나 음성으로 표현해낸 것을 녹음하면 프로그램을 통해 악보화되고, 원하는 악기로 연주된다. 개인들이 악기를 잘 다루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음악으로 연주해낼 수 있는 기술적인 조력자들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잘 활용할 경우 작곡가가 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남들로부터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 또한 평범한 사람이 작곡한 것을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시스템도 구축되어 있다. 또 로블록스(Roblox)같은 메타버스 플랫폼에서는 거기서 제공되는 여러가지 툴을 이용하여 게임을 창작할 수도 있으며 제페토 같은 플랫폼에서는 누구가 가상패션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 최근 Midjouney 혹은 Open AI의 Dall-e와 같은 생성 AI 툴을 활용하면 누구가 손쉽게 이미지를 창조할 수 있다. 이렇게 메타버스에서 우리는 이미지와 서사, 나아가 게임을 창조하고, 남에게 이미지를 감상하거나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물질 과잉 소비 소모경제(Material hyper production&Consumption Economy)로부터 비물질적 창조감상경제(Immaterial Creation&Appreciation Economy)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현재 AI의 개발은 주로 인간이 해냈던 고도의 예술적 창작 능력을 해낼 수 있는가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는 요즘 폭발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Chat GPT3 같은 AI가 인간의 예술적 창작활동을 대체하고 때에 따라 능가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그러나 Chat GPT3가 동주의 시 스타일을 학습하여 동주보다 더 동주 같은 시를 출력할 수 있어도 결코 동주가 살았던 역사적 현실을 살아낼 수 없듯이, AI 출력하는 예술작품은 흉내 내기나 위조품에 불과하다. 사실 인간의 예술 활동은 인간 간의 공감을 이루어내는 중요한 사회문화적 활동이며, 따라서 예술 활동은 공감을 통한 사회문화적 공동체의 형성에 지대한 역할을 한다. 이 점이 중시된다면, 예술의 갖는 이러한 역할을 AI에게 이양할 것이 아니라 AI가 인간의 예술적 창작활동을 보조하는 도구로써 연구, 개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통해 모든 인간이 모든 인간에 대해 생산자와 소비자가 아니라 창작자와 감상자가 됨으로써 활성화되는 경제활동이 실현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물질과잉생산소비경제를 비물질적 창조감상경제로 전환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이러한 경제로 전환된다면 공감이 경제의 기초가 된다. 또 공감은 공동체 의식으로 고양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공감이 기초되는 경제는 공동체 경제로 고양될 수 있다.
4. 메타버스 비물질 경제와 스마트순환경제의 융화
이렇게 메타버스의 경제활동은 물질 과잉 소비 선형경제를 비물질화할 뿐만 아니라 공감을 기반으로 한 경제활동을 촉진한다. 이 공감은 공동체 의식으로 고양될 수 있는 잠재력이다. 따라서 메타버스 경제에는 복합적 존재론적 위기의 병인이 되는 스마트선형경제를 스마트순환경제로 전환시킬 수 있는 공동체적 책임감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이 전환에서 기술적으로 지금까지 활용해왔던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극 정밀 추적 감시를 통해 축적되는 빅데이터와 AI처리 능력을 지금까지와는 달리 역적용시키는 방식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빅데이터AI 처리기술을 다른 방향으로 적용시키면,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모든 제품으로부터 또 다른 가치를 발견하여 그 가치를 다시 창조해내는 경제 시스템인 순환 경제를 이룰 수 있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순환적 수요 공급망, 수요 공급의 실시간 조율 일치 공유 플랫폼, 그리고 Servitization(서비스로서의 제품)라는 기제가 마련되어야 한다. 이러한 기제들을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디지털 인프라의 기술은 Cyber Physical Systems-cross-industry collaboration, Sensoring, Intelligent market and logistics platform, the Internet of Things 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총괄 조율하고 메타버스와 연동시켜 스마트순환경제로 전환시키는 역할은 바로 미래의 AI가 해야 하는 것이다.
팬더믹과 가속화되는 기후위기에 노출되는 대멸종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절실한 것은 비물질적 창조감상경제이다. 그리고 이 비물질적 창조감상경제 시장의 작동 원리는 공감이라고 할 때 이 공감이 잘 발전하면 스마트순환경제로 향하는 공동체의식에 중요한 동기부여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미래의 주인공이 될 우리의 젊은세대는 4차산업혁명을 넘어 스마트순환경제로 향하는 5차산업혁명의 선구자 역할을 해야하지 않을까. 이를 위해서는 스마트 순환경제와 메타버스를 연동시키는 미래세대의 과감하고 도전적 연구가 절실하다. 그리고 메타버큘라노미는 세계를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경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5차 산업 혁명에 의해 도래할 이 새로운 경제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집을 잘 짓고 잘 보살피는 지혜로운 운영법이 될 것이다. 이때 우리의 미래세대들은 그 집에서 잘 사는 삶(Well-being)을 누릴 수 있는 미래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미래를 향한 비전이 그야말로 이상적인 그러나 실현불가능한 비전에 불과할까? 그러나 이미 이러한 미래를 향한 업을 일으킨 선구자들이 있다. 다음 호에서는 이 선구적 사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건축과 경제의 필연적 관계
지난 호에서 미래를 전망하기 위해 어떤 도시가 미래의 도시가 될 것인가를 전망하는 것이 미래비전을 포괄적으로 또 구체적으로 선명화하기 위해 중요한 길잡이가 될 수 있음을 밝혔다. 그런데 그 도시의 건축은 경제와 분리될 수 없는 필연적 관계를 갖고 있다.
건축은 동물의 서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에서 거주하는 인간이 집을 짓고 자신의 삶의 영위하는 지극히 인간에게만 고유한 행위이다. 그리고 건축과 인간의 존재론적 차원의 성찰에 기초하여 설계된 집이 건축되면 그 집(Oikos)에서 사는 인간들을 잘 살려내는(Well-being) 지혜로운 운영법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경제(Economy)의 원 뜻인 Oikonomia이다. 경제생활(Economy)의 원 뜻은 고대 그리스어로 집을 뜻하는 Oikos를 잘 보살펴 거기서 사는 사람들의 삶을 살려내는 활동이다. 이러한 경제생활을 원 뜻을 기억하며 다시 도시의 경제생활을 보면, 경제는 도시를 그 곳의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집처럼 보살펴 그 안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잘 살려내야 한다. 그러나 현대 도시 경제생활은 도시를 공동체의 집으로 보살피는 경제생활이 아니다. 그것은 지능화된 스마트 선형경제로서 폐기물을 양산하여 오히려 공동체의 집으로서의 도시를 파괴하고 있다. 미래도시는 따라서 현대문명의 치명적 과오인 근본 원인인 스마트 선형경제를 극복하는 새로운 혁신 경제의 발흥지가 되어야 한다. 우선 현대문명의 과오를 실질적 생산하는 스마트선형경제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난 후 미래도시가 발흥시켜야 할 새로운 산업혁명, 5차산업혁명을 설계해보도록 하자
4차산업혁명의 실패?
현대문명은 1차산업혁명이 이후 발전하는 과학기술에 의해 경제가 성장 팽창되었고, 또 최근에는 스마트 기술에 의해 급속히 지능화되면 성장하고 팽창하였다. 그러나 현대문명의 근간이 되는 경제는 1차에서 4차에 이르기까지 선형경제(linean economy)라는 점에서는 어떤 혁신도 없다. 다만 그 선형경제가 새로운 과학기술에 의해 더욱 고효율화되었을 뿐이다. 선형경제는 근대경제체제가 21세기 현재이르기까지 최근 유행하는 용어로 표현하면 1차에서 4차에 이르는 혁명을 겪었지만, 그 변혁을 관통하며 근저에 자리잡고 있다. 사실상 근대 산업혁명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경제는 사실상 선형경제라는 점에서 변혁도 혁명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선형경제란 대체 무엇인가?
선형 경제의 작동 양상은 다음과 같다. 이 경제에서는 자연의 모든 것은 자원으로만 존재할 가치가 있으며 따라서, 자연으로부터 최대한 효율적으로 자원을 채굴된다, 그러나 자원은 그 자체 존재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상품으로 제조될 때만 존재한다. 그리고 자원으로부터 제조된 상품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것을 소비하게 함으로써 만이 존재가치를 실현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소비자로서 활동하도록 유혹받으며, 제품을 소유하고 소모함으로써 결국 폐기물을 양산해낸다. 이 선형경제는 따라서 우리의 소비 욕망을 무한으로 증식시키고 이는 자연으로부터 채굴한 물질의 과잉소비로 이어지며, 이 소비는 자원의 소모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선형소비경제는 실질적으로 폐기물을 양산하는 시스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이 선형경제는 디지털전환과 4차산업혁명을 통해 스마트화되고 AI에 의해 지능화되면서 스마트 선형경제로 급성장하고 있다.
이 스마트 선형경제는 폐기물이 고효율 초고속으로 기하급수적 증가세로 천문학적 규모의 폐기물 양산 문명으로 급팽창하고 있다. 그 결과 모든 생명체의 근간이 되고 있는 자연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폐기물로 넘쳐나는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이로써 생명체들의 생존 환경들의 경계가 무너지며 일대의 혼란이 생겨난다. 이는 인간의 세계와 동물의 환경이 뒤섞이는 존재론적 카오스로 귀착되고 새로운 인수공통 감염병이 출현하며 글로벌 노마딕 생활양식을 통해 팬데믹으로 창궐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전염병이 출현하는 상황은 단순히 공중보건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인의 삶과 생명체의 삶 전반을 파멸로 몰아넣는 상황이다. 이는 역으로 다시 스마트선형경제의 작동을 마비시키는 역습으로 되돌아오고 그 스마트선형경제의 굴레 안에서 그 경제에 의존하여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경제생활 자체를 위기에 몰아넣는다. 따라서 코로나 팬더믹은 보건이나 의료영역의 문제가 아니라 기후, 경제, 생명 공동체 전반의 존재론적 파멸의 상황으로 봉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코로나 팬데믹은 복합적인 존재론적 위기(Onto-Syndemic)라 해야 할 것이다.
5차산업 혁명을 향하여
최근 스마트기술을 통해 급성장, 급팽창한 스마트선형경제는 근본적으로 인간 삶의 모태가 되는 자연을 자원의 저장소로 격하시키고 자연을 무자비하게 채굴하는 방식으로 자연과 관계하고 있다. 이러한 경제는 근본적으로 자연에 대한 공격과 파괴성을 극복할 수 없다. 따라서 스마트선형경제와 자연과의 관계를 성찰하며 자연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의 전환이 절실하다. 그리고 이 성찰의 결과 미래의 경제로 떠오른 경제가 순환경제(circular economy)이다. 이 순환경제는 선형경제의 치명적 과오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발아하는 현장이다. 특히 순환경제는 현재 세계 원자재의 90% 이상이 경제 분야로 다시 유입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순환경제는 지속 가능하고 자연의 자원화를 최소화하는 경제 패러다임이다. 선형경제(Linear economy)는 자연에서 ‘원 료 취득(take) → 생산(make) → 사용(use) → 폐기(dispose)’라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선형 경제와는 달리 순환경제 그 자체는 회복력과 재생력을 갖도록 설계된다.
이 순환 경제 모델은 기술적 순환과 생물학적 순환을 구분한다. 예를 들어, 생물학적 순환 내에서 소비가 일어날 때, 음식, 면직물, 나무와 같은 천연 재료들은 퇴비로 만들어지고 혐기성 발효 과정을 통해 시스템 순환으로 돌아간다. 기술 순환은 재사용, 수리, 재처리 또는 재활용과 같은 전략을 통해 제품, 성분 및 자재의 회수 및 회수를 담당한다. 이 원리의 목적은 자원 고갈의 위험에서 벗어나 인간과 생태계의 지속 가능한 삶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제품을 천연 또는 자원으로 완전히 재사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와 함께 기존 제품보다 품질이나 가치가 높은 제품을 만들고 자원의 선순환을 보장하기 위해 재료의 특성을 재활용하는 새로운 개념의 '업사이클링'이 제안되었다.
결국 순환경제에서 제품은 기획, 디자인 단계부터 생물학적으로 또 기술적으로 순환가능하도록 설계, 생산되어 야 한다.
순환경제는 이미 20세기 후반부터 유럽에서 모색되었다. 그러나 순환경제가 추구하는 순환을 실질적으로 또 효율적으로 실현하는 기술의 부재로 상당한 난관에 봉착하고 있었다.
순환경제가 실현에서 가장 중요한 인프라는 제품의 생산에서부터 폐기의 과정이 실시간으로 추적되는 시스템의 구축이다.
아울러 진정 사물이 소비품으로 소모되어 폐기물화되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들과 사물과의 관계를 소비적 소모적 관계로 유혹하는 압박을 탈출하여 사물과 인간의 관계를 가치 순환적 관계로 설정하는 인간 정체성의 혁신이 절실하다. 즉 인간은 사물에 대해 더 이상 소비자로서의 자기정체성을 해체하고 새로운 인간 정체성을 정립해야 한다.
순환경제가 추구하는 목적이 효율적으로 현실화되고 인간의 정체성이 새롭게 구성되는 도시 경제를 실현시킬 수 있는 기술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생각해보기로 하자.
이종관( 성대철학과 / 미래인문학 연계전공 명예 교수)
모든 세대는 그 이전 세대가 남겨준 유산을 넘겨받는다. 그 유산은 다음 세대가 살아가야 할 미래에 희망의 빛을 드리울 수도 있고 그림자를 드리울 수도 있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경우, 미래 세대는 희망의 빛이 들어올 수 있는 창문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성공했을 때 역사는 좋은 가치를 창조하는 미래를 향한다.
미래의 주인공이 될 우리의 미래세대들은 불행하게도 기성세대들로부터 코로나 위기를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한 시대의 위기의 그 시대의 문명의 심층에 잠복한 야만이 폭로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우리의 미래세대들은 역사의 주인공이 기성세대에서 미래세대로 교체되는 이 시점의 역사적 의미를 잘 해석해야만 희망의 빛이 드리우는 미래를 살 수 있을 것이다.
현시점은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대 전환기의 변곡점이라는 시대사적 위치를 갖는다.
팬더믹으로 노출된 현대문명의 위기는 단순히 뉴노멀등의 유행어로 극복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 위기는 현대문명을 그 근원으로부터 반성하고 혁신하는 심층적 사유를 통한 대전환을 요구한다. 이러한 성찰적 혁신적 사유를 선도하는 국가는 역사에서 새로운 문명을 연 선진국으로서의 명예를 누린다. 그런데 금년 우리나라는 현대문명의 후진국으로서 과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선진국으로서 세계사적 지위를 획득했다.
이 두가지 역사적 맥락은 우리나라에게 미래를 향한 세계사의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과제를 부여한다. 즉 미래를 향한 대전환의 변곡점에서 선진국으로 등극한 우리나라는 단순히 물질적 경제성장을 이끌어 가는 국가가 아니라 대전환이 지향해야 할 미래 가치와 그것의 실현 방향을 제시하고 이끌어가는 국가로서 역사에 빛을 던져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대전환을 이끌어 갈 미래가치는 모든 문제를 포괄하는 초거대 미래비전을 설계해야 하는 엄청난 과업이다. 도대체 이러한 엄청난 일을 미래세대들은 어떻게 감당해낼 수 있을까? 사실 미래를 향한 초거대비전을 구체적으로 기획하는 일은 한 세대의 작업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 삶의 한 영역을 잘 선택하면 인간 삶의 거의 모든 문제를 포괄하며 미래의 문제를 삶과 밀착된 실질적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논의할 수 있다. 그 영역은 인간 일상적 삶이 매일 생생하게 진행되는 도시이다. 따라서 코로나로 노출된 현대문명의 야만을 극복하기 위한 초거대 미래비전을 기획하는 작업은 미래세대들이 실질적으로 살게 될 도시가 어떤 도시가 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수렴된다.
물론 코로나시대를 거쳐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살게 될 우리의 미래세대들은 사회적 거리 두기를 강제 당했었다. 그로 인해 그들은 디지털 환경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세로 사용하면서 일과 사회적 관계의 디지털화와 가상화에 빠져들고 있다. 따라서 도시의 문제는 미래세대의 관심 밖에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오히려 인간 거주의 중요성이 더욱더 중요해지고 있다. 특히 재택 수업과 근무의 결과로 집과 자신이 거주하는 동네를 중심으로 영위되는 일상적 라이프스타일이 회복됨으로써 자신의 집과 거주 공간에 한 관심 또한 커지고 있다. 집이 단순히 퇴근 후 잠만 자는 수면 공간이 아니라 삶의 중요한 거주공간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에게 자신이 사는 곳의 뿌리와 집단 정체성과의 만남을 허용한다.
더구나 건축은 당대 최첨단 과학기술이 동원되어 인간들이 살게 될 공간을 물질화 시키고 나아가 인간을 공동체로 결속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경주는 신라시대의 첨단기술이 총동원되어 지어진 공동체이고 오늘날의 서울은 이 시대의 첨단 기술이 총동원되어 지어진 공동체이다. 따라서 어떤 도시가 구상되는가에 따라 개발되어야 할 기술의 종류가 결정된다.
건축은 도시 공간과 그곳에 실존하는 인간들의 일상적인 상호작용의 거의 전 부문에 물질적으로 고정가능한 양태를 부여한다. 나아가 건축은 그 인간들이 주변 환경을 인식하고 해석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을 직접적으로 결정한다. 따라서 건축은 어떤 용도의 건축물을 짓건 간에 공동체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건축은 삶의 맥락을 진부하게 만들고, 불만을 유발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소모적인 삶으로 유도할 수도 있다. 그 반대로 웰빙을 증진하고, 공동체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영토 유산 인식을 높이고, 자연 존중을 촉진할 수 있다. 건축을 통해 어떤 도시가 만들어지는가에 따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결정되는 것이다. 윈스턴 처칠의 말처럼 “ 도시는 인간인 만들지만 그 도시가 다시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또 현상학적 건축가 팔라스마도 같은 방식으로 인간과 도시의 관계를 밝힌다. “나는 도시 안에, 도시는 내 안에 거주한다”. 그렇기에 건축된 도시의 분위기와 구조에 따라 그 안에 사는 인간공동체의 욕망과 요구가 달라질 수 있고 그 결과로 도시 정책 및 비즈니스 방식이 재정의될 수 있다.
따라서 대전환의 미래를 향한 초거대비전을 구체화하고 실질화하기 위해 미래세대를 위한 도시를 기획하는 작업은 건축의 역사적 미래적 그리고 공동체적 책임에 충실한 사회적 가치를 창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미래세대를 위한 도시는 현대문명이 빠져있는 복합적 존재론적 병리를 극복하는데 기여해야 한다. 코로나 위기와 지구가열화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멸절의 위기상황에 빠진 복합적 존재론적 병리(Onto-Syndemic)를 폭로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미래의 도시를 구상하는 작업은 건축의 일부에 국한하는 건축철학, 즉 건축의 기술적 측면 아니면 건축의 미학적 측면 등에 편중된 건축철학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지금 절실히 요청되는 건축철학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포괄하는 가운데 건축과 인간의 삶을 본연에서부터 접근하여 건축을 근본적으로 존재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동시에 현대기술을 반성적으로 성찰하며 기술의 대전회를 시도하는 해야한다. 그러한 건축철학만이 미래도시를 기획하는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건축과 기술을 근본적으로 존재론적으로 이해하면, 자연의 근본적 두 차원, 즉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과 기술이 화해하고 융화할 수 있는 미래 인간들의 집을 짓는 비전이 설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 건축철학이 있는가? 다행스럽게도 건축을 존재 전체를 포괄하는 차원에서 탐색하며 현대기술의 근본적 문제점을 고찰하는 철학이 있다. 하이데거(M. Heidegger)의 존재론으로부터 발아하여 크리스티안 노르베르그 슐츠(Chrtistian Norberg-Schulz)에서 건축 현상학으로 성숙되는 존재론적 건축 현상학이 바로 그것이다. 이 존재론적 건축현상학이 미래를 향한 기획에 요청되는 이유는 우리가 살아왔던 현대 그리고 탈 현대 도시 나아가 최근 대세를 형성하고 있는 미래도시비전인 기술중심적 스마트 시티의 문제점을 밝혀보면 더욱 절실해진다. 다음호에서는 근대와 현대 그리고 기술중심적 스마트시티의 문제점을 밝혀내며 존재론적 건축철학의 내용을 소개해보도록 하자.
10.인간의 세가지 미래상(3)-스티브잡스가 발견한 인간
2022.01.23. 오후 2:05 by 이종관
AI의 아바타로 사는 것, 혹은 트랜스휴먼·포스트휴먼으로 진화하는 것 외에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미래상은 바로 “죽음을 인정하면서 본래적 자신을 향해 사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그 표현자체가 상당히 심오한 뉘앙스를 갖고 있어 일단의 현학적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입장에 불과할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혁신의 선구자로서 세계 제일의 기업을 일구어낸 인물이 바로 인간을 죽음과의 관계에서 통찰하며 우리에게 인간에 관한 진리를 전해주려 한다. 그는 바로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Steven Jobs)이다.
스티브잡스
그리고 그 인간에 관한 진리가 울려 퍼지는 현장은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2005년 스탠포드대학 졸업식 연설이다. 이 연설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잡스의 언명은 “ Stay Hungry, Be Foolish”라는 문구이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있다.
“죽음은 우리 모두의 숙명이다. 아무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왜냐하면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 ‘죽 음’이니까. 죽음을 직면해서는 모두 떨어져 나가고, 오직 진실로 중요한 것들만이 남기 때문이다”
이는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했던 말과 거의 같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마틴 하이데거
하이데거는 잡스의 스탠포드 대학 연설이 있기 80년 전쯤 그의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만이 죽을 운명의 존재자이다. 다른 것은 다만 소멸할 뿐. 죽음을 미리 앞서서 깨달으면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이 되고 본래적으로 존재한다.”
대체 잡스와 하이데거는 우리에게 인간에 관한 어떤 진리를 일깨우고 싶은 것 일까.
사실 우리는 대개 남을 따라 일상의 삶을 살고 있다. 학생들에게 대학을 왜 왔는지 물으면 대다수가 남들이 가기 때문이라고 답변한다. 또 학과나 전공 선택의 이유를 물으면 부모님의 결정이나 학원배치표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직업 선택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졸업 후 어떤 직장에 취업하려는 이유를 물으면 남들이 그 직장이 좋다고 해서 답변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결국 우리는 각자 일상의 삶을 살며 자신의 삶을 살지 않는다. 남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남을 따라 살다가 남들이 사는 방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만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나의 삶이 위기에 처하는 국면이 시작된다. 그리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위기가 계속 깊어지면, 결국 내가 사회에서 도태되고 그 미래는 결국 죽음이라는 사실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그때 내 삶은 남이 대신해줄 수 없다는 깨달음이 생기면서, 자기 삶을 자기의 책임 하에 비로소 인수하게 된다. 그때 비로소 진정한 자아가 된다. 이렇게 내가 나의 진정성을 회복하는 것은 “남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열어주는 것이다.
여기서 최고의 혁신 기업 애플의 기업 모토가 “다르게 생각하기”(Think Different)임이 주목될 필요가 있다.
또 하나 우리의 시선을 끄는 사실은 스티브 잡스와 레이커즈와일의 대비되는 입장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스티브 잡스와 레이 커즈와일은 21세기 과학기술의 혁신 문화를 이끌어가는 두 명의 영웅이다. 스티브 잡스는 누구나 다 아는 과학기술 혁신 문화의 아이콘이다.
레이 커즈와일은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지만, 말 그대로 진짜 기술자이다. MIT의 인공지능학자였고, 전자건반악기를 발명해서 큰 돈을 벌기도 했다. 지금도 영창피아노 대리점에서 전자피아노 브랜드에 새겨진 그의 이름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다. 그는 현재 구글의 임원으로 미래사업을 지휘하는, 그야말로 과학 기술 혁신문화의 영웅이다.
그런데 이렇게 과학기술 혁신을 이끌어 가는 두 사람이 인간과 죽음에 대해 보는 시선은 정반대이다. 레이 커즈와일의 경우는 죽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최고 기능결함이다.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과학기술을 통해 제거함으로써 궁극에 가서는 영생을 누리는 포스트휴먼, 즉 호모데우스( 신이된 인간)로 탈바꿈해야 한다.
반면 스티브 잡스에 따르면 죽음에 대하 깨달음이 곧 우리를 진정한 자아로 회복시킨다. 죽음은 사실 인간이 아직 도달하지 않은 미래이다. 그런데 그 미래가 항상 현재에 개입해 들어오고, 또 그것을 우리가 깨닫기 시작하면 비로소 나는 나의 삶을 나의 책임 하에 인수하는 진정한 자아가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실존주의 철학자, 로베르트 슈패만 (Robert Spaemann)를 경청할 필요가 있다.
로베르트 슈패만
그는 ‘만약 인간이 영원히 산다면, 인간의 삶에서 죽음이 없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슈패만에 따르면
“인간이 영원히 산다는 것은 모든 순간, 모든 기쁨, 모든 인간적 만남이 무의미한 것으로 퇴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영원히 산다면 모든 것은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슈패만은 또한 반복되지 않는 유한한 인생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매 순간의 귀중함은 그것이 우리 삶에서 되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영원한 삶 속에서는 어떠한 것도 귀중하지 않다. 따라서 삶의 종말에 대 한 불안이 없다면, 의미와 가치로 충만된 현존재도 없다.”
철학자 스패만의 입장은 물리학자 스테판 호킹의 삶에서 더 큰 울림을 갖는다.
스테판 호킹
거의 기계와 합체된 몸으로 살 수밖에 없는 스테판 호킹(Stephan Hawking)의 삶은 하루 하루가 고난이었다. 어느 날 기자가 ‘당신은 왜 그렇게 연구를 열심히 하느냐’라는 질문을 했다. 그 질문에 호킹은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나는 내일이라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여 살아야 했다.”
죽음을 대하는 호킹의 이러한 삶의 태도는 그가 물리학자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리학자는 모든 것을 물질로 보고 연구하는 사람이다. 만일 모든 것이 물질이라면 죽음은 숫자 0, 즉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나 호킹은 죽음을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는 대신 그것을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 여겼다. 그리고 그의 삶을 최선의 차원으로 승화시킨 동력은 바로 끊임없이 죽음이라는 미래를 되새기는 그 마음가짐이었던 것이다.
필자: 이종관
성필균관대 철학과 교수. 성균관대 하이브리드 미래문화연구소 소장. 미래인문학 주임교수. 첨단과학기술과 관련된 도시, 경제, 문화 예술 문제를 미래인문학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주요저서: 포스트휴먼이 온다. 공간의 현상학, 건축, 그리고 풍경. 사이버문화와 예술의 유혹. 디지털 철학 등
9. 인간의 세가지 미래상(2)
2022.01.18. 오후 12:06 by 이종관
지난 회에 인간에게 다가오는 인간의 첫번째 미래상으로 "인공지능의 아바타"를 전망하였다.
두번째로 인간에게 다가오는 미래상은 인공지능의 아바타가 되기 싫다면, 인간 스스로 인공지능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이를테면 우리의 머리에 스스로를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 인공두뇌(meta brain)를 이식함으로써 빅데이터 분석과 외국어 자동 번역 등을 수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급속도로 발전하는 첨단과학기술은 우리 신체를 지속적으로 개조, 그 성능을 증강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과학기술을 통해 인간의 신체를 개조하고 그 성능을 상상 이상의 수준으로 증강시킬 수 있다는 입장은 소위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에서 주장된다.
트랜스휴머니즘은 이미 1950년대에 줄리안 헉슬리(Julian Huxley)의 주도로 등장했고, 1990년 후반에 본격화되었다.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트랜스휴머니즘은 극소수의 미래학자들 사이의 현학적 말놀이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트랜스휴머니즘은 2010년대에 들어서 그 실현 가능성이 학문적 논쟁의 주제로 등장할 만큼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2016년도를 기점으로 기대와 우려가 엇갈리는 주도적 미래 전망이 되어가고 있다. 대표적인 트랜스휴머니스트는 최고의 미래 학자로서 명성을 구가하고 있는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이다.
커즈와일은 MIT 인공지능연구소 최고 엘리트교수였으며 무그신테사이저(Moog Synthesizer)라는 전자악기를 발명하여 사업가로도 성공하였다. 그는 구글등이 지원하는 싱귤라리티 대학의 총장을 역임하였고 최근에는 아예 구글의 최고 기술담당 임원으로 재직하며 구글의 미래사업을 지휘하고 있다. 커즈와일은 90년대부터 수렴기술의 특성과 기술의 폭발적 성장 변곡점인 특이점을 2045년으로 예견한 바 있다.
그리고 이 특이점을 지나면 첨단과학기술을 통해 인간의 성능을 가속적으로 증강시켜 인간을 현생인류의 한계를 벗어난 인간 이후의 미래 주인공, 즉 포스트휴먼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고 한다. 나아가 이렇게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포스트휴먼은 궁극적으로는 인간 최대의 숙명적 기능 결함인 죽음까지 제거하여 죽지 않는 영생의 신적 인간, 즉 호모데우스(homo deus)로 거듭난다.
커즈와일은 그저 명성만이 높은 미래학자가 아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구글의 미래사업을 지휘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미래비전은 구글의 기술력, 그리고 구글의 엄청난 자본의 지원을 받으며 성공여부와 관계없어 상당한 경제, 정치, 문화적 파급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점에 있어서 그가 전망하는 미래 인간상으로서 영생의 포스트휴먼도 황당한 헛소리로 치부할 문제가 아니다. 커즈와일은 뇌과학, 뇌공학, 인공지능기술, 합성생물학등이 가속적 발전으로 발전하며 서로 성공적으로 수렴될 때 영생의 인간을 제조해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커즈와일의 입장은 인간의 자의식이 두뇌 활동의 산물이며, 또 그 두뇌 활동은 화학적·전기적 활동으로 치환된다는 첨단과학적 사고방식에서 근거한다. 간단히 말하면 두뇌는 전기신호를 전달/변환하여 자의식을 만들어내는 신경세포의 체계이며, 자의식은 그 체계가 만들어내는 패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첨단과학의 입장에 따르면 인간이 영생의 포스트휴먼으로 거듭나게 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전기신호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특정 인간의 두뇌작용을 MEG 등으로 정밀하게 스캔하여 그의 두뇌 활동에 대한 빅데이터를 구축한다.
둘째, 뇌영상 처리장치를 통해 그 빅 데이터를 분석하여 인간 두뇌에서 인지 작용을 수행했던 신경망을 3차원 모델로 재구성하고, 이 모델을 신경망 계산 모델로 번역하여 프로그램으로 작성한다. 즉, 인간의 자의식과 그것을 구성하는 행동 패턴이 디지털 프로그램으로 번역, 즉 이뮬레이션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의식을 디지털화한 프로그램을 슈퍼컴퓨터에 업로드하여 가동시킨다. 이 과정이 성공한다면, 인간의 신체가 노화나 사고등으로 작동을 정지한다 할지라도 그의 기억, 상상, 사고 습관 등을 포함한 두뇌활동 이 컴퓨터의 소프트웨어로 작동·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육체에 기반했던 자의식은 디지털 프로그램으로 이뮬레이션되어 탈육체화되고 컴퓨터에 업로드되어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커즈와일의 영생이다.
물론 현시점에서는 커즈와일이 주장하는 "자의식의 업로드" 나아가 영생의 가능성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커즈와일은 과학기술의 가속적 발전양상에 근거하여 그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2050년경에는 이러한 존재 방식이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커즈와일이 전망하는 자의식의 업로드를 통한 죽음의 제거가 갖는 문화적 영향력은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 특히 여러 공상 과학 영화의 상상력에 중요한 모티브역할을 하고 있다. 죠니뎁 주연의 2013년 트랜스센덴스 그리고 2018년 키에노리브스 주연의 리플리카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레이 커즈와일과 구글은 이렇듯 죽음을 인간이라는 존재자의 치명적 기능 결함으로 파악하고 이를 제거하기 위한 연구와 사업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구글이 설립한 회사가 바로 캘리코(Calico)이다. 그들이 전망하는 인간의 미래상, 포스트휴먼은 사회 경제적인 영향력으로 등극하고 있는 것이다. 구글이 2012년경에 공개적으로 선언한 죽음과의 전쟁은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할 정도로 화제가 된 바가 있고 지속적으로 이 문제를 중요한 보도 주제로 다루고 있다. 2022년 오늘날에는 미국 실리콘 벨리의 갑부들이 이 죽음을 제거하는 영생 사업에 엄청난 관심과 투자하고 있어 미래를 향한 현실적 파급력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커즈와일과 함께 호세 루이스 코르데이로(Jose Luis Cordeiro) 는 영생의 포스트휴먼을 미래주인공으로 주장한다. 그런데 그는 딥러닝에 의존하는 현재의 인공지능이 아니라 유전학 알고리즘(genetic algorithm)에 기반한 인공생명(artificial life)의 성공적 개발에서 포스트휴먼의 미래를 예견하였다. 그는 2010년 한국 부산에서 개최된 제 1회 세계 인문학 포럼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미래 인간상 포스트휴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망한다.
“호모사피엔스는 지구상 최초로 진화와 한계의 의식을 가진 종이며, 인간은 종국적으로 이들 제한을 넘어서 진화된 인간, 즉 트랜스휴먼과 포스트휴먼으로 발전할 것이다. 이 과정은 영장류에서 인간으로 진화한 과정과는 달리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듯 빠른 과정이 될 것이다. 미래의 지능을 가진 생명체는 인간을 전혀 닮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포스트휴먼은 탄소기반 시스템뿐만 아니라 우주여행과 같은 상이한 환경에 보다 유리한 실리콘 및 다른 플랫폼에 의존할 것이다.”
코르데이로가 제시한 ‘실리콘 기반의 미래인류’라는 개념은 보다 더 파격적이다. 이는 인류가 탄소와 단백질 기반의 유기생물체(혹은 wet life)에서 실리콘 기반의 존재자(dry life)가 될 것이며 포스트휴먼의 진화 속도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 될 것이라는 예고하기 때문이다.
필자: 이종관
성필균관대 철학과 교수. 성균관대 하이브리드 미래문화연구소 소장. 미래인문학 주임교수. 첨단과학기술과 관련된 도시, 경제, 문화 예술 문제를 미래인문학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주요저서: 포스트휴먼이 온다. 공간의 현상학, 건축, 그리고 풍경. 사이버문화와 예술의 유혹. 디지털 철학 등
8. 인간의 세 가지 미래상(I)
2022.01.12. 오후 12:50 by 이종관
지금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는 인간의 미래 모습을 여러 가지로 탐색해보면, 세 가지 정도로 정리되는 것 같다. 첫 번째는 “인공지능의 아바타”가 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인공지능을 이식한 “죽지 않는(Immortal) 인간 이후의 존재(Posthuman)”가 되는 것, 세 번째는 “죽음을 인정하면서 본래적 자신을 향해 사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인간에게 다가오는 인간의 미래상은 낯설고 어색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세가지 미래상은 이미 특정한 문화적 사건으로 목격한 장면이다.
첫 번째, 인공지능의 아바타를 인간의 미래상으로 예고했던 장면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목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국이 바로 그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인간의 미래상과 관련해서 가장 큰 의미를 지닌 사람은 이 세돌도 알파고도 아니다. 이세돌 앞에서 알파고의 지시에 따라 바둑돌을 옮기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인간의 미래를 전망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아자황이라는 이 사람의 이름조차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하다. 오히려 이 사람의 이름을 알려고 한다면, 그것이 비정상이다. 아자황이란 이 사람은 여기서 인간으로서 아무 존재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람이 바로 인간의 미래 모습을 예고한다. 왜 그럴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구글이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목적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구글은 알파고와 같이 바둑을 잘 두는 인공지능을 만들고 싶은 것이 아니다. 구글의 궁극적 목적은 general artificial intelligence, 범용 인공지능의 완성이다.
범용 인공지능이란 인간과 관련된 모든 영역에 탑재되어 인간들이 서로에게 제공하는 서비스나 능력보다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인공지능을 이른다. 우리는 스마트폰이라는 범용 기계 없이는 살 수 없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범용 인공지능이라는 것이 개발되면, 우리는 그것 없이 살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범용인공지능은 아직까지는 개발되지 않았다. 그러나 구글이 예측하는 바에 따르면 2045년 이후에는 완성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만일 구글이 예측하는 것처럼 미래의 어떤 시점에 이 범용 인공지능 완성되어 인간보다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이 장면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이 장면은 사실 바둑을 두는 장면 이다. 그러나 동시에 현재 시장 경제의 기본 원리인 경쟁의 상황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이 경쟁의 상황에서 이 세돌 앞에 있는 사람, 아자황이 취하고 있는 행태가 굉장히 독특하다. 이 경쟁 상황에서 이 사람은 경쟁에 이기기 위해서 오히려 자신의 두뇌를 쓰는 것을 스스로 금지하고 있다. 그리고 전적으로 알파고의 지시를 대행하고 있다. 이 경쟁 상황에서 자신의 두뇌를 쓰면 패배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구글의 최고 기술 담당 임원 레이커즈와일이 예고하 듯 2045년이 지나 인간과 관련된 모든 것에 범용 인공지능이 탑재된다고 했을 때, 우리가 경쟁력을 가지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우리 역시 우리의 두뇌를 쓰는 것을 금지하고 범용인공지능에 의탁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자기의 행위를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다른 것에 의탁하면서 그들의 결정을 대행하는 존재를 우리는 아바타라고 부른다. 2045년에 general artificial intelligence, 즉 범용 인공지능이 완성되었을 경우 인간은 어떤 존재론적 위치에 배치될 것인가. 범용인공지능의 아바타가 아닐까. 현재의 아바타는 메타버스에서 우리를 대행하고 있지만 미래에는 우리가 인공지능의 아바타로 존재하게 될지도 모른다.
다음 회에서는 인간에 다가오는 두번째 미래상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필자: 이종관
성필균관대 철학과 교수. 성균관대 하이브리드 미래문화연구소 소장. 미래인문학 주임교수. 첨단과학기술과 관련된 도시, 경제, 문화 예술 문제를 미래인문학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주요저서: 포스트휴먼이 온다. 공간의 현상학, 건축, 그리고 풍경. 사이버문화와 예술의 유혹. 디지털 철학 등
7. 죽음의 수용소에서 발견한 진리-사람, 의미를 향해 사는 존재? 니체와 프랑클
2022.01.09. 오후 9:06 by 이종관
대체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가?
니체는 인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삶이 살아야 할 의미가 분명하다면 어떠한 고난도 견디어 낸다.” 이 말은 잘 음미해보면, 나라는 인간은 바로 이렇게 살 수 있기 때문에 물체도, 기계도 아니며, 또 동물과도 다른 독특한 삶의 방식 내지는 존재방식을 가지는 것이다. 하지만 니체의 말에 동의할 수 있을까.
니체의 말은 여러 사례를 통해 입증될 수 있다. 예컨대 동물은 생존 충동에 의해 생존하는 존재이다. 먹이 충동이 일어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먹이 충동이 일어나도 자기가 추구하는 삶의 의미에 따라 먹지 않을 수 있다. 단식투쟁이 그런 경우이다. 단식투쟁은 먹이 충동이 일어나더라도 타인의 인권 등을 위해서 먹이 충동을 억제하는, 그런 고난을 감수하는 것이다. 인간은 소위 정의라고 하는 것을 위해, 혹은 타인의 인권과 같은 것을 위해서 생존 충동을 거부하는 고난을 스스로 선택한다. 동물의 경우 이렇게 먹이 충동을 거부하는 행동이 불가능하다.
혹자는 단식투쟁과 같은 경우는 너무 고차원적이고 극히 예외적인 상황이라고 이의를 제기할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반드시 이런 고도로 숭고하고 도덕적인 삶의 의미를 추구할 때에만 생존 충동을 거부하고 고난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의미가 예를 들어 멋진 몸매에 있다고 할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이어트는 배고픔이라는 고난을 견디어내며 멋진 몸매라는 삶의 의미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행위이다. 이러한 삶의 행위는 동물에게는, 기계에게는, 물체에게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니체의 말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표현해보면, 인간에게 고유의 존재방식이 더 분명해질 수있을 것이다.
'인간은 살아야 할 의미가 불분명하다면, 아무리 물질적 경제적 생존환경이 풍요로워도 스스로 죽는다."
이것이 입증될 수 있을까. 우리나라가 그 사례이다. 1960년대 우리나 의 국민소득은 100 달러에 불과했다. 그러나 최근 3만 2천 달러를 넘어섰다. 인간과 동물의 존재방식이 같다면 이러한 국민소득의 증가는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2022년의 대한민국 사람들은 1960년대와 비교하면 무려 100배 이상 풍요로워진 물질적 경제적 생존환경 속에 산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생존환경이 물질적, 경제적으로 무려 100배 이상 향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생존을 포기하는 사람의 수가 폭증했다. 우리나라는 소위 자살률이 부동의 세계 1위인 국가이다.
그런데 생존의 조건의 향상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죽는가. 동물의 경우, 주어진 생존환경이 좋아진다면 동물은 자기에게 주어진 수명을 다 살고 간다. 인간이 그냥 주어진 생을 연장해가는 동물과 같이 생존하는 존재라면, 향상된 생존환경에서 스스로 죽음 선택하는 자살이 증가하는 이유는 어떻게 설명될 것인가.
여기서 포착되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은 생존에 필요한 영양분 혹은 물질 공급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저 생존하는 것은 인간이 사는 방식이 아니다. 그러면 대체 인간은 어떻게 사는가. 가장 분명한 것은 사람은 물체와 달리, 또 동물과 달리, 살면서 항상 자신을 살게 하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 간다는 사실이다. 삶의 의미를 만들지 못할 때 그래서 살 가치가 없다고 자각하는 순간, 그 삶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며 따라서 스스로 죽는다.
이렇게 인간의 삶은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며 살아가는 질적 실존 현상이다. 인간에게는 의미, 가치 목적성취 같은 질적 현상들이 인간의 삶을 살게 하는 결정적 요인이다. 때문에 인간에 관한 니체의 언명 역이 성립하는 것이다.
“인간은 살아야할 의미가 불분명하다면, 스스로 죽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빅터 프랑클의 고백에 귀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빅터 프랑클은 2차대전이란 현대 문명의 비극을 온 몸으로 살아낸 유태계 출신의 신경생리학자이자 의사이다. 당시 갓 결혼한 신혼의 젊의 의사였던 플랑클은 불행하게도 나치 집권 이후 유태인 수용소에 약 4년간 감금되었다. 더욱 불행한 것은 그의 부인, 부모, 일가친척 등이 모두 수용소로 끌려가게 된다.
하지만 그곳에서 모두가 사망하고, 프랑클만이 혼자 살아남는다. 이러한 처절한 비극이 생생한 역사적 현실이었던 유태인 수용소에서 프랑클은 ‘인간의 적나라한 실존’을 무려 4년이나 온몸으로 겪는다. 그리고 그 생생한 역사적 현실에 대한 체험을 통해 그가 목격한 인간에 관한 진리를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인간은 조건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그 조건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 가는 인간의 자유이다.”
프랑클의 이러한 증언은 어떤 논리적 추론을 통해 얻은 결론도 또 어떤 인위적 실험의 결과도 아니기 때문에 경청되어야 한다. 누차 강조한 바와 같이 그가 온몸으로 겪은 생생한 현실에 대한 체험에 근거하고 있다.
프랑클은 수용소에 감금된 후, 인간으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목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곳에서 심지어 자신의 몸마저 빼앗겼다. 자신의 몸은 나치가 시키는대로 행동하는 나치의 소유물이었다. 그럼에도 그에게서 빼앗아갈 수 없는 마지막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처한 상황에 대해 어떤 태도를 선택하는 자유이다.
프랑클의 증언에 따르면, 그 끔찍한 수용소에서 몸마저 빼앗긴 인간들이 취하는 행태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났다. 어떤 경우에는 성자로, 어떤 경우에는 돼지로. 하지만 프랑클은 그들을 성자로 만들고 돼지로 만드는 것은 아우슈비츠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들이 추구했던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참혹한 상황에서도 성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돼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혹자에게는 유태인 수용소는 우리의 현재 삶과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일지 모른다. 정녕 그럴까?
프랑클이 발견한 인간 존재의 진리“인간은 조건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를 우리 자신과 관련시켜보자. 나는 대한민국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는가? 프랑클이 나치 시대에 태어난 것이 그의 선택이 아니었듯이, 우리가 이 나라에서 태어난 것은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대한민국을 비관하면서 이민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은 이곳을 개혁하기 위해 실천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살기를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우리도 이미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 상황에 대해 스스로 어떤 태도를 선택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철학에는 인간의 선택의 자유, 즉 "자유의지"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상당히 소모적인 논의들이 많다. 소위 인간 행위의 결정론과 비결정론 사이의 논란은 혼전에 혼전을 거듭하고 있다. 어떤 진영은 뇌과학의 연구결과에 의지하여 결정론을 주장하기도 하고 어떤 진영은 심지어 양자물리학의 비결정론을 동원하여 인간의 자유를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프랑클은 죽음의 수용소에 인간에 관해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그의 고백적 철학서 “ 의미를 찾는 인간” 에서 니체를 인용하며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전한다.
“ 살아야 할 의미가 분명하다면, 인간은 어떠한 고난도 견디어 낸다”
“ 인간으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 하나, 주어진 환경에서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자신의 길을 찾는 자유는 빼앗을 수 없다”
“Everything can be taken from a man but one thing: the last of the human freedoms-to choose one's attitude in any given set of circumstances, to choose one's own way.”
그런데 디지털전환의 혁명적 상황에서 미래는 인간에게 어떤 미래상을 제시하고 있는가. 다음 회에는 프랑클이 전해주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마음에 새기면서 아직 오지 않은 인간의 미래상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필자: 이종관
성필균관대 철학과 교수. 성균관대 하이브리드 미래문화연구소 소장. 미래인문학 주임교수. 첨단과학기술과 관련된 도시, 경제, 문화 예술 문제를 미래인문학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주요저서: 포스트휴먼이 온다. 공간의 현상학, 건축, 그리고 풍경. 사이버문화와 예술의 유혹. 디지털 철학 등
6. 사람과 인공지능의 구별? 튜링과 아렌트
2022.01.09. 오후 1:00 by 이종관
인간, 그는 누구인가.
디지털 전환를 향한 과학기술의 진보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컴퓨터의 창시자에게 한번 물어보도록 하자. 컴퓨터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튜링은 본인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이 무엇인가, 즉 인간의 정의를 뒤흔들어 놓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튜링 이전까지는 생각-특히 논리적이고 수리적인 계산을 할 수 있는 고도의 인지 능력-은 오직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을때, 그 생각은 바로 이러한 논리적 수리적 연산능력이었다. 그러나 튜링은 그가 발표한 논문을 통해 기계도 생각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동시에 그것을 실험적으로 증명 해 보일 수 있다는 소위 튜링 테스트라는 것을 제안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학문적 논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통해서 인간에 관한 정의가 동요하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데카르트 이래로 생각이라는 것이 인간의 본질적인 정의이다. 그런데 이 생각이라는 것을 기계가 더 잘 한다면 인간의 정의는 기계에게 이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기계가 더 인간의 정의를 완벽하게 충족시킨다. 그러면 기계가 진정 더 인간적이 아닌가.
튜링 테스트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1명의 피험자 앞에 하나의 컴퓨터(machine)와 한 명의 사람(human)이 있다. 피험자가 볼 수 없도록 장막을 치고, 피험자가 컴퓨터와 인간과 대화를 하면서 어떤 쪽이 인간이고 어떤 쪽이 컴퓨터인지 구별하도록 하는 과제를 부여한다.
튜링이 이 실험을 제안할 때만 해도 이 실험을 진행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은 카카오톡 등으로도 인간과 챗봇을 각각 놓고 시험 자가 대화를 해보는 식으로 쉽게 진행할 수 있다. 이때 어떤 것이 기계이고 어떤 것이 인간인 지 구분하기 어렵다고 하면 기계가 인간의 수준만큼 지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일론 머스크가 주도하는 오픈 AI가 지난해 개발한 GPT3와 같은 거대AI는 튜링테스트를 통과한 듯 보인다. GPT3는 시와 논문으로 보이는 단어와 문장을 조합해내는 능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AI가 인간들이 시로 간주하는 글자들을 조합해낸다는 점에서 인간과 같은 창의적 AI가 탄생했다고 해야 할 것인가?
물론 철학계에서는 튜링테스트를 둘러싸고 존 설이란 철학자의 중국어방 논증 등 많은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 논란은 철학자 사유가 아니라 엄청나게 복잡한 논리의 함정에 빠진 지적 혼란에 다름아니다. 이 혼란은 튜링테스트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다시 보면 간단하게 종식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반려견을 피험자로 하는 튜링테스트를 설계하여 실험해보자. 즉 실제 개와 로봇 개를 놓고 함께 지내도록 해보자. 이때 실제 개가 로봇 개를 실제 개로 인식하는 행동을 보인다면?
튜링테스트의 논리를 따른다면 실재의 개가 로봇 개를 실재 개와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로봇 개는 실재 개와 같은 동물성을 구현한 것이라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주장인가. 실재의 개가 로봇 개를 살아있는 개와 구별하지 못하는 행동을 보이는 경우, 우리는 로봇 개를 진짜 개와 동일시한 그 개가 지능이 낮아 오인한 것이라고 판정한다. 인간에게 튜링테스트를 적용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앞서 개에게 적용한 튜링테스트에서 개가 로봇 개와 진짜 개를 구별하지 못한 것이 오인에 불과한 것처럼, 인간이 AI와 인간을 구별하지 못했다고 해서 AI가 생각이라는 인간의 능력을 구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오인일 뿐이다.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튜링테스트는 AI와 인간을 같은 것으로 착각하는 인지적 오인으로부터 AI와 인간의 존재를 동일시하는 존재론적 결론을 추론하는 오류이다.
사실 튜링테스트를 둘러싼 직업철학자들의 어지러운 논쟁에 휘둘리기 보다는 튜링테스트가 함축하고 있는 중요한 의미를 통찰하는 것이 더 철학적이다. 이 실험이 ‘인간이 무엇인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실험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튜링테스를 튜링 자신에게 적용시키면 어떻게 될까. 피험자에게 딥페이크와 튜링을 구분하도록 했는데, 피험자가 딥페이크가 더 튜링 같았다고 답한다면, 그래서 앞으로 딥페이크튜링과 인간 튜링과 동일하게 취급한다면, 튜링은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물론 튜링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튜링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답은 의외로 다른 예에서 쉽게 구해질 수 있다. 인공지능을 대상으로 한 튜링 테스트는 튜링 같은 천재만이 구상할 수 있는 기발한 실험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튜링테스트는 사실 몇 년 전 모 방송국 히든 싱어라는 프로그램과 구조가 같다. 이 프로그램은 오리지널 가수와 모창 가수를 구별하는 프로그램인데, 가끔 방청객들이 모창 가수를 오리지널 가수라고 판정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오리지널 가수는 어떻게 하는가? 굉장히 당황하는 반응을 보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서 한나 아렌트의 말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평생 인간을 전체주의로부터 구출하기 싸웠던 아렌트는 인간의 탄생을 ‘기적’으로 밝혀낸다. 한 인간의 탄생은 과거에도 없고 미래에도 없을 유일한 존재자의 탄생이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늘 우리를 일깨웠다.”당신은 경이롭다!”(You are amazing!)
모든 인간은 무엇과도 또 누구와도 같을 수 없는 독보적인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인간은 무엇과도 또 누구와도 같을 수 없는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 실존적 진리를 부인할 수 있을까. 부인할 수 없다면, 아렌트가 강조한 인간의 존재 방식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함축한다. 인간은 복제될 수도, 시뮬레이션(simulation)될 수도 없다. 그것은 인간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을 오히려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튜링 테스트이다.
다음회에서는 삶의 철학자 니체와 유태인 출신 신경생리학자이며 철학자인 빅터 프랑클을 따라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밝혀보기로 하자.
필자: 이종관
성필균관대 철학과 교수. 성균관대 하이브리드 미래문화연구소 소장. 미래인문학 주임교수. 첨단과학기술과 관련된 도시, 경제, 문화 예술 문제를 미래인문학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주요저서: 포스트휴먼이 온다. 공간의 현상학, 건축, 그리고 풍경. 사이버문화와 예술의 유혹. 디지털 철학 등
5. 4차산업혁명의 방향전환: 사람중심 4차산업혁명?
2022.01.08. 오후 12:44 by 이종관
이러한 문제의식은 2017년도 G20 정상회담에서 4차산업혁명을 인간 중심의 경제 발전으로 선언하게 된다. 우리나라도 이를 빨리 수용하여 “사람 중심 4차 산업혁명”이라는 방향으로 정책의 전환이 추진된다. .
그런데 4차산업혁명이 '사람 중심'으로 추진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람'에 관한 문제이다. 사람을 무엇으로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사람 중심의 4차 산업 혁명'이 도달할 미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간을 물질체로 보는 관점을 따른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우리를 물질체로 취급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을 물질체로 대상화하면서 연구하는 방식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모든 것을 물리적 관점에서 물리적 원리를 응용하여 탐구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에서는 이러한 입장을 바로 물리주의(physicalism)라고 한다. 학문적 객관성을 표방하는, 그리고 인정받으려고 하는 대다수의 학문은 물리주의를 선택하고 있다.그리고 이 입장은 제거주의(elimitivism)으로 과격화된다. 제거주의는 인간을 논의하고 탐구하는 데 있어서 비물리적인 접근 방법은 비과학적이기 때문에 다 제거해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것이 그저 하나의 학문적 방법론으로 머무른다면 몰라도, 그러한 학문에 기초해서 “사람 중심의 4차 산업혁명”의 정책을 설계하고 4차 산업혁명을 추진한다면 이 혁명이 도달할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될까?
두 번째로, 설령 사람을 물체로 보지는 않더라도 사람을 기계로 보면, 그리고 그 관점에서 4 차 산업혁명을 추진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러한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사람 중심의 4차 산업혁명은 당연히 인간을 기계화하지 않을까. 또한 그에 따라 인간이 사는 세계를 공장으로 만들지 않을까. 물론 우리를 기계로 취급하는 것 역시 일상생활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사실 인간을 기계로 본 역사는 굉장히 오래되었다. 데카르트의 제자였던 라메트리는 인간기계론을 주장했다.
그리고 현대 경영과학의 창시자 프레드릭 테일러도 인간을 기계화하려 하였다. 그는 경영과학은 인간을 기계와 동일하게 오로지 메뉴얼에 따라 작동하는 기계로 관리하는 체계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기에 테일러는 노동자로부터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게 된다.
물론 라메트리나 프레드릭 테일러의 입장은 지나간 과거이다. 그러나 과연 인간을 기계로 보는 입장이 완전히 극복되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리고 혹시 이러한 입장에서 4차 산업혁명을 추진한다면, 그러한 사람 중심의 4차 산업혁명은 인간을 기계화하고 인간이 사는 세계를 공장화하는 미래가 되지 않을까하는 우려를 할 수밖에 없다.
인간을 기계로 보지 않더라도, 인간을 동물로 보는 입장 역시 상당히 강력하다. 역시 일상의 사회생활에서 인간을 동물로 취급한다면, 용납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의 일종이라고 보는 것은 물리주의나 기계론과는 달리 상식적으로도 수용되는 입장이다. 인간의 사회와 동물의 무리생활은 존재론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보는 입장이 바로 사회생물학이다. 동물의 무리생활에서 연구된 결과 들을 인간 사회에 적용시켜서 탐구하려고 하는 것이 사회생물학의 기본 입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을 동물로 보는 학문에 근거하여 정책을 수립하고 사람 중심의 4차 산업혁명을 추진한다면, 그 4차 산업혁명이 도달할 미래는 무엇인가? 인간을 동물화하고 인간이 사는 세계를 먹이사슬의 정글로 만들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러한 의혹을 가질 수 있고, 이 시점에서 당연히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 자신인 사람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사람중심 4차산업혁명의 미래가 우리자신인 그 사람을 기계화하는 미래 혹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먹이사슬의 정글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시급하게, 우리 자신과 직접적으로 진정성을 갖고 만나면서 물어야 한다. 다음회에는 우리 자신을 만나보도록 하자.
필자: 이종관
성필균관대 철학과 교수. 성균관대 하이브리드 미래문화연구소 소장. 미래인문학 주임교수. 첨단과학기술과 관련된 도시, 경제, 문화 예술 문제를 미래인문학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주요저서: 포스트휴먼이 온다. 공간의 현상학, 건축, 그리고 풍경. 사이버문화와 예술의 유혹. 디지털 철학 등
4. 4차산업혁명의 설계도
2022.01.07. 오후 3:49 by 이종관
2016년, 이러한 전망은 마침내 거대 자본과 만나는 단계로 들어가며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시대사적 변혁으로 발발한다. 그런데 이 4차산업혁명은 그 몇 년 전 독일에서 발표된 『Industry 4.0』이라는 독일 경제의 혁신을 향한 정책 설계도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설계도는 첨단과학기술이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 경제발전을 이루게 될 것인가를 비교적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독일의 산업 4.0이 추구하는 최종 목적은 Mass Customization, ‘대량주문생산’이다. 독일이 산업 4.0을 통해 이러한 목표를 설정한 배경에는 그 당시 독일이 중국에 상당한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은 제조업 수출 국가로, 국민 1 인당 수출액이 압도적으로 세계 1위를 차지하는 국가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번영을 통해 사회적 정의와 복지를 성공적으로 성취하는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social market economy)는 세계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그런데 독일의 이러한 수출지향형 산업구조가 중국에 의해 위협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독일의 사회적 시장 경제는 저렴한 인건비를 통해 상품의 대량생산과 공급을 이뤄낸 중국과는 달리 노동의 가치를 매우 중시하는 국가이다. 그 가치를 지키면서도 중국에 대해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전략이 바로 대량 주문 생산, 즉 소비자가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타겟팅하여 제품을 생산하는 방법이었다. 사실 우리가 소비생활을 하면서 실질적으로 원하는 것은 무조건 싼 제품이 아니라 적절한 가격에 나의 취향에 맞는, 어떻게 보면 세상에서 유일한 제품이다.
대량 주문생산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첨단 핵심 기술들이 동원되어야 한다. 첫 번째로는 소비자 개개인의 빅 데이터(Big data)가 구축되어야 한다. 이는 2010년부터 전 세계의 사람들이 사용하기 시작한 스마트폰을 통해 가능하다. 사실상 오늘날의 소비자들은 스마트폰을 사용하며 매 순간 구글에 로그인, 접속하고 있다. 소비자가 구글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는 순간 구글 역시 소비자의 정보를 수집하고 있으며, 이렇게 수집된 소비자 개개인의 엄청난 양의 데이터, 즉 빅데이터 속에 소비자 개인의 소비 취향을 예측할 수 있는 규칙 혹은 패턴이 숨어 있다.
그러나 인간의 두뇌는 이것을 파악할 수 없다. 일단 인간의 두뇌는 빅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는 용량이 없고, 이 어마어마한 양의 데이터를 처리해서 패턴을 파악할 능력은 더더욱 없다. 따라서 인간을 능가하는 고도의 인지능력을 발휘하는 인공지능의 개발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 인공지능으로 빅 데이터를 처리하고 개개인들의 취향을 파악한 다음, 심지어는 그 개개인들이 스스로 요구하기도 전에 앞으로 그들이 필요로 할 상품을 미리 예측한다. 그리고 이 예측된 상품을 신속하게 생산하여 소비자에게 전달한다. 이를 위해서는 제조 설비를 완전 자동화해야 한다.
이러한 설비들을 Advanced manufacturing systems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이루는 핵심 설비 중 하나는 첫째 우리가 익히 들어온 3D Printing이다. 또한 앞으로 소비자들의 취향은 더욱 다양해져서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소재들을 우리가 필요로 할 것이므로 Nano technology가 필요하고, 이 설비들은 24시간 풀가동되어야 하기 때문에 Robot 또한 필요하다. 이렇게 생산된 것을 소비자들에게 빠른 속도로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최근 많은 논 의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자율 자동차, 드론 등도 필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정책의 실행을 앞두고 여러 차례 토론을 나누는 과정에서 산업 4.0 나아가 4차 산업혁명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가 대두되었다.
첫째로, 4차 산업 혁명을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 지의 여부가 문제시되었다. 혁명은 인간이 주체가 되어 미래의 비전을 설정하고 그 비전을 향해 역사를 이끌어 나가는 ㅅ실천적 행위이다. 그러나 인간의 두뇌는 4차 산업혁명을 지휘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4차 산업혁명은 역사가 인간을 추방하는 탈인간화 (posthumanization)라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두 번째로, 4차 산업혁명은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인간이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는 미래에 정향되어 있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는 달리 말하면 4차 산업혁명의 반인간적 경향(antihumanization)에 대한 우려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모든 서비스가 AI, VR/AR/MR로 대체되며 인간이 잉여인간화되는 멸인간화 (dehumanization)현상이 일어나지 않겠냐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필자: 이종관
성균관대 철학과 교수. 성균관대 하이브리드 미래문화연구소 소장. 미래인문학 주임교수. 첨단과학기술과 관련된 도시, 경제, 문화 예술 문제를 미래인문학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주요저서: 포스트휴먼이 온다. 공간의 현상학, 건축, 그리고 풍경. 사이버문화와 예술의 유혹. 디지털 철학 등
3. 21세기의 시작, 포스트휴먼, 4차산업혁명의 발발
2022.01.07. 오후 3:42 by 이종관
메타버스를 향한 4차산업혁명이 발발할 조짐은 언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는가. 21세기가 시작될 즈음이었다. 그때 ‘과학기술이 상호작용하며 통합을 이루고, 그로 인해 엄청난 변 혁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2002년도 미국과학재단의 NBIC 보고서(2002)가 이 소문의 진원지이다.
이 보고서는 ‘Converging Technologies for Improving Human Performances’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인간의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융합기술’이라고 번역된 바 있다. 그러나 이 보고서의 내용을 고려하여 정확하게 번역하면 ‘인간의 성능 증강을 위한 수렴기술’이 되어야 한다. 모든 것을 나노 수준의 물질로 수렴시키고 디지털화하여 공학적으로 제작한다는 것이 기본입장이기 때문이다. 이 보고서는 NBIC보고서로 불린다. 당시 최첨단 기술로 각광받기 시작한 네 개 분야의 기술(Nanotechnology, Biotechnology, Information Technology, Cognitive Science)을 21세기를 이끌어갈 것으로 전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인문학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인간의 마음도 머지않아 완벽하게 양화(quantify)가 가능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동시에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이 그러한 미래를 설계해 나갈 핵심기술로 전망된다.
이 NBIC보고서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부분은 그들이 통계학적 분석을 통해 찾아낸 과학기술의 발전 속도이다. 현재의 과학 기술의 발전 속도가 등속이나 감속운동이 아니라 가속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전문적으로는 과학기술의 지수 함수적 발전 (exponential growth of technology)라고 한다. 이는 개별 연구자들이 연구 해서 예측해낸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과학 기술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개별적 연구는 대체로 지지부진하다. 그런데 현대의 연구 네트워크라고 하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또 시시각각으로 그 연구 결과들이 유통되고 있다. 그런데 이것들이 어느 지점에 모이기 시작하면 발전의 속도가 급진전을 이루어낸다. 이렇듯 과학기술이 전체적으로 통합되어 이루어내고 있는 발전의 속도가 가속적이며 이는 2016년 알파고가 보여준 성능에서 증명된다. 인공지능의 발전 속도가 개별연구자들이 자신의 연구경험으로 토대로 예측한 것을 완전히 능가해버렸기 때문이다. 실로 알파고와 이 세돌의 대결 하루 전날까지 한국의 어떤 인공지능 전문가도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길 것이라는 예측하지 못했다.
첨단기술이 수렴되면서 이루어내는 가속적 발전은 그저 기술영역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아니다. 이 기술은 인간의 성능을 증강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때문에 만일 시간에 따른 첨단기술의 진보를 그래프의 x축으로 설정한다면, x값이 증가함에 따라 인간성(humanity)에도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리하여 첨단기술이 가속적으로 발전하여 인간 성능이 증강된다면, 우리는 인간의 상태를 넘어서는 단계, 즉 초인간(transhumanity) 단계에 진입하게 된다.
그런데 첨단 기술의 발전이 보이는 가속의 양상은 수학적으로는 2차함수의 그래프를 그리게 되고 2차함수는 그 특성상 어느 지점에서 급격한 비약적 상승의 양상을 띌 수밖에 없다. 따라서 첨단기술의 가속적 발전은 어느 지점에 도달하면 수직에 가깝게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NBIC 보고서는 이 지점을 역시 수학적 메타포를 동원하여 "특이점"(the singularity)이라 부르며 약 2045년경으로 계산해 내었다. 특이점을 지나면 인간의 성능 증강 역시 비약적 양상을 보일 것이다. 따라서 2050년 이후 미래 역사의 주인공은 인간 성능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난 인간 이후의 존재자, 즉 포스트휴먼(posthuman)이 될 것이다. 포스트휴먼으로 도약하는 인간의 성능 증강은 경제학적으로 보면 생산성 증대로 이어진다. 따라서 NBIC 보고서는 인간의 성능 증강이 상상 이상의 경제 성장을 촉진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필자: 이종관
성균관대 철학과 교수. 성균관대 하이브리드 미래문화연구소 소장. 미래인문학 주임교수. 첨단과학기술과 관련된 도시, 경제, 문화 예술 문제를 미래인문학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주요저서: 포스트휴먼이 온다. 공간의 현상학, 건축, 그리고 풍경. 사이버문화와 예술의 유혹. 디지털 철학 등
2. 사회적 거리 두기의 선물: 고독과 철학의 시간
2022.01.07. 오후 2:51 by 이종관
그런데 우리들은 코로나 바이러스 침공으로 이러한 문제를 생각하기에 좋은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는 역설적으로도 사회적 거리두기가 제공한 선물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우리들은 코로나 블루라는 홀로됨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홀로 남겨진다는 상황은 블루라는 수식어가 의미하듯 심리학적으로는 우울한 상황이다. 그러나 철학적으로 보면 홀로 남겨진다는 것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20세기의 위대한 여성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시선으로 보면, 이 홀로된다는 상황은 적어도 두 가지 양상을 가질 수 있다. 아렌트는 그의 유작 『정신의 삶(The Life of the Mind』에서 홀로됨의 양상을 "고립"(Loneliness)과 "고독"(Solitude)으로 구분하였다. 대개의 경우 홀로 남는 상황은 남으로부터 버림받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 처하면 우리는 괴로워하고 외로워하며 지루해 한다. 때문에 우리는 이를 벗어나기 위해 시간 죽이기에 골몰한다. 아렌트는 이러한 외로움과 지루함의 상황을 "고립"이라 칭한다.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현대인이 비디오게임과 넷플릭스 시청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 역시 고립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지루함과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일까. 남으로부터 버림받아서일까. 이 홀로됨의 상황에서 괴로워하는 자는 사실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버림받는 미아가 되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이는 홀로됨의 또 다른 양상을 살펴보면 밝혀진다.
홀로 남겨지는 상황이 반드시 자신으로부터 버림받는 상황으로 귀결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타인과 뒤섞여 사회생활을 하면서, 대부분 남을 따라 그야말로 제삼자로 살고 있다. 그러다가 현재와 같은 외압적인 상황에 의해 홀로 남게 되는 상황은 어떤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지금까지는 남을 따라 사느라 사실상 내 삶의 주인공이 자신이 아니라 남이었다면, 남들과 뒤섞이는 상황 속에서 이탈됨으로 해서 우리는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된다. 이는 나의 삶이 나 자신으로 충전될 수 있는 그러한 정신적인 차원으로 고양될 수 있는 기회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성찰하고, 또 자신을 성찰하는 가운데 내가 살고 있는 세계,내가 살고 있는 이 자연이 무엇인지를 자신의 삶의 진정성을 회복한 상태에서 성찰해 볼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홀로됨은 나 자신으로 회복됨으로써 나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와 타인과의 관계, 심지어는 자신의 삶의 근거가 되는 자연을 자신의 진정성을 회복한 가운데 성찰할 수 있게 되는 상황으로 승화될 수 있다.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상황을 고립과 구별하여 "고독"(Solitude)이라고 부른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고독 (Solitude)는 자신과 세계에 대한 성찰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바로 철학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사회적 거리 두기는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불행한 사태를 통해 가지게 된 시간이다. 그러나 이 계기를 시간 죽이기에만 골몰하지 말고 오히려 자신과 세계에 대한 철학의 시간으로 선용하면 어떨까. 이제 고독(Solitude)이라는 철학의 시간을 활용하여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문제를 성찰해 보기로 하자. 그 절박한 문제는 우리가 처한 시대적 위기가 과연 디지털전환의 4차산업 혁명과 메타버스를 향한 대 이동으로 극복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적어도 디지털 전환이 본격화된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 4차산업 혁명의 심층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 이종관
성균관대 철학과 교수. 성균관대 하이브리드 미래문화연구소 소장. 미래인문학 주임교수. 첨단과학기술과 관련된 도시, 경제, 문화 예술 문제를 미래인문학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주요저서: 포스트휴먼이 온다. 공간의 현상학, 건축, 그리고 풍경. 사이버문화와 예술의 유혹. 디지털 철학 등
1. 코로나 바이러스의 침공과 메타버스를 향한 인류의 대이동
2022.01.07. 오후 2:38 by 이종관
2022년 새해가 밝았다. 벌써 3년째 접어든다. 2020년 1월, 새해를 맞이한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우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전쟁에 휘말려 들었다. 그 적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보이지 않는 적이다. 우리의 몸속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이 적은 우리가 활동을 하면 할 수 록 또 더 많이 모이면 모일수록 우리를 공격해온다. 최첨단을 자랑하는 현대 의학은 이 적을 코로나 바이러스로 식별하였다.
코로나 바이러스 이전에 전 세계의 대도시는 세계 도처에서 관광을 온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원하는 상품을 소비하며 사는 라이프스타일을 즐겼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뒤덮는 팬데믹으로 급격히 확산된 이후 그 대도시가 텅 비어 버렸다. 그들은 도심을 떠나 어디론가 피난을 갔다. 그런데 그들은 어디로 피난을 갔을까? 집으로? 아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다. 우리들은 잠시 집을 거쳤을 뿐 사실상 디지털 공간으로 도피했다.
우리는 거의 모든 일상의 삶을 디지털 공간 속에서 수행함으로써 코로나 사태의 회피책을 찾은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삶 자체가 디지털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디지털 기술 기업의 매출이 다른 모든 경제 영역에 비해 매출이나 수익, 주가 등에 있어 성장했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Microsoft 사는 두 달 만에 2년 치 디지털 전환 수요가 몰려 1분기 매출이 15%나 증가하고 클라우드도 급성장했다고 밝혔다. 코로나 사태에 따라 많은 업계가 타격을 입었지만, 우리들이 디지털 공간으로 도피함에 따라 IT와 첨단 기업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지배적인 시사용어로 자리 잡은 디지털 전환이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디지털 전환은 오늘날 코로나 바이러스의 침공으로 갑작스레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철학적으로 보면 디지털 전환은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데카르트는 보편적 기호학에서, 라이프니츠는 보편 수학에서 모든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그리고 진리와 거짓을 수리적 2진법으로 처리하여 모든 것을 자동적으로 연산하는 미래를 꿈꿔왔다. 물론 이 꿈은 초기에는 철학자들의 몽상에 불과했다. 이러한 꿈은 20세기 들어 컴퓨터의 발명으로 서서히 실현되는 듯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을 넘어서 경제가 생산 자본주의에서 기호가치 중심의 소비 자본주의로 탈바꿈하자 기호의 생산과 유통 소비를 실현하는 정보통신기술이 요구되었다. 이 정보통신기술을 효율적으로 가동시키는 것이 컴퓨터 나아가 인공지능이었으며, 21세기 들어 인공지능이 선도하는 디지털 전환, 일명 4차 산업혁명이 가속화의 단계로 접어든다. 초기 디지털 전환은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에서는 철학적 이상이었으나, 2차 대전 이후 경제와 융합되고, 21세기에 들어서 가속화되기 시작하면서 혁명의 양상을 보였다.
그리고 결국 2016년 4차산업 혁명으로 선언되었다. 그러다 코로나 침공을 받고 디지털전환의 4차산업 혁명은 가속화에서 급속화의 단계로 진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해가 지난 2021년에 들어서서 4차산업혁명은 인간들을 새로운 우주를 향해 대 이동을 시킨다고 한다. 메타버스가 바로 그 새로운 우주이다.
그런데 이렇게 디지털 도피를 전격 실행함으로써 삶 자체가 메타버스라는 디지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상황이 계속될 경우, 우리 인간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또 다른 재앙으로, 다시 말해 디지털 코로나라는 새로운 재앙으로 다가올 것인가, 아니면 코로나의 원래 뜻이 왕관인 것처럼 인류에게 영광을 선물하게 될 것인가. 이 문제는 인간의 미래 운명이 무엇인지를 전망하기 위해 반드시 생각해 보여 할 절실한 문제이다. 이제 다음 회부터 이 문제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필자: 이종관
성균관대 철학과 교수. 성균관대 하이브리드 미래문화연구소 소장. 미래인문학 주임교수. 첨단과학기술과 관련된 도시, 경제, 문화 예술 문제를 미래인문학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주요저서: 포스트휴먼이 온다. 공간의 현상학, 건축, 그리고 풍경. 사이버문화와 예술의 유혹. 디지털 철학 등
14. 뉴욕: 스마트카지노에서 싹트는 미미한 희망의 풍경-하이라인
2022.06.17. 오후 2:03 by 이종관
뉴욕! 뉴욕! 전세계의 중심.
전세계의 운명이 돈으로 환산되며 시시각각으로 결정되는 곳!
디지털혁명을 철학적으로 읽던 일을 하던 우리, 그일이 지겨웠는지 갑자기 풍경의 영혼을 찾아 떠난 여행! 그 뜬금없이 여행을 떠난 이유가 신기하게도 뉴욕에서 밝혀진다.
우리는 라스베가스를 거쳐 뉴욕으로 왔다. 라스베가스가 구시대적 카지노의 도시라면 뉴욕은 천문학적 규모의 스마트카지노 도시이다. 여기서 배팅되는 돈의 규모에 비하면 라스베가스의 그것은 막말로 껌값이다.
언제부터인가 자본주의는 카지노 자본주의로 변신하였고 그 카지노 자본주의가 디지털화와 스마트화를 거치며 첨단화된 고향이 바로 뉴욕, 그중에서도 거대한 황소상이 지키고 있는 월스트리트이다.
2차산업혁명이후 역사가 미래로 향하는 운명을 맡긴 곳. 3차산업혁명, 즉 디지털 트랜스포매이션(전환)이 출발하며 금융 자본의 흐름이 디지털 공간으로 급속히 이주한 후 자본은 디지털 공간의 공간성인 급변성에 휘말려 들었다. 이 급변성은 리스크이지만, 그 기복을 잘만 타고 투자하면 잭팟을 터트릴 수 있는 도박의 기회를 제공한다.
1970년 이후 가장 신속하게 디지털화가 이루어진 역사의 현장이 주식시장이고 이 주식시장이 가속적으로 디지털 공간으로 이주함으로써 뉴욕은 디지털, 나아가 오늘날 스마트 카지노자본주의의 메카가 되었다.
그 뉴욕의 한켠에 위치한 월스트리트는 전세계의 운명을 순식간에 좌우지하는 스마트카지노 자본주의를 관통하는 길이다.
그러나 뉴욕에는 월스트리트라는 길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뉴욕의 다른 한켠에 하이라인이라는 길도 있다. 월스트리트로부터 발생한 한 투자회사 잘 못된 배팅이 디지털공간에서 광속으로 확산되며 전세계를 경제 파산으로 몰고갔던 2010년경, 그때 월스트리트와는 다른 방향에 위치한 하이라인이라는 공원이 뉴욕에 출현하였다. 그리고 이 하이라인에서 피어오르는 풍경은 월스트리트와는 다른 영혼으로 우리에게 조그만 희망의 싹을 움틔었다.
하이라인(Highline)은 뉴욕시 미트패킹에서 맨허탄 허드슨강 철도 화물 하적지에 이르는 1.5 mile 길이의 공원이다. 원래 하이라인은 1930년대 완공된 20km에 달하는 고가철도였다.
뉴욕 주위를 순환하며 화물수송을 담당하던 하이라인은 자동차의 출현으로 완공 20년도 안되어 점차 사용가치를 잃어갔다. 이는 근대 산업혁명 이후 세계가 테클로놀지 공간으로 탈바꿈되어 일어나는 필연적이 결과이다. 역설적으로 철도는 테크놀로지 공간을 지탱하는 문자그대로 기반시설임에도 이 테크놀로지 공간에서 폐기된다. 왜 그럴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테크놀로지 공간에 대해 잠시 사색해 본다.
테크놀로지 공간에서 모든 것은 오직 기능적 연관관계 속에서 자기 아닌 다른 것으로 가공될 수 있을 때에만 존재 의미를 갖는 부속품으로 전락한다. 테크놀로지의 공간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른 것으로부터의 주문에 따라 끊임없이 이주를 강요당하는 “고향상실Heimatlosigkeit”의 공간이다.
이렇게 테크놀로지의 공간에서 존재하는 것들은 어떻게 존재하는 가가 밝혀지면, 철도가 존재하는 방식도 분명해진다. 근대세계의 공간인 테크놀로지의 공간에서는 오직 다른 것으로 가공되기 위해 끊임없이 수송될 때만 존재하는 고향상실의 존재자들만이 위치할 수 있다. 철도는 바로 이러한 존재자들을 수송하는 기능으로만 존재하는 테크놀로지 공간의 기반시설이다. 그러나 이 철도 역시 수송의 기능을 담당하지 못할 때 테크놀로지 공간에 부속될 수 없다. 그것은 테크놀로지 공간에서 존재가치를 상실하고 방치되거나 폐기되는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 1980년 이후 완전히 방치되어 흉물로 변해버렸다.
이러한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던 90년대의 뉴욕시는 당시 시장, 또 전임 미국대통령 트럼프의 절친 쥴리아니의 지휘아래 이 폐철로를 완전히 철거하고 당시의 트렌드를 추종하는 포스트모던적 재개발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는 곧 일단의 시민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시민들의 통행을 금지하고 방치된 그곳에서 야생의 풀이 돋아 오르고 나무가 자라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미하지만 근대와 현대의 뉴욕에서는 기대할 수 없었던 풍경이 형성되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철골과 아스팔트 그리고 콘크리트덩어리로 압사할 것 같은 이 지역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없는 야생의 꽃과 풀이 무성히 자라는 식생지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마치 우리의 시인 김수영이 읊어내듯 “죽음 같은 기다림으로 일천년도 더” 대지에 “숨을 죽이고 있는 씨앗들”이 이제 비로소 마법을 풀고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이... .
철거계획에 저항한 일단의 시민들은 바로 여기서 숨통이 열린 감동을 받으며 어떤 의미심장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감지한 것 .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무엇이라 말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이라인의 친구들’이란 시민단체를 조직하고 Save the Track 이란 기치아래 철거계획을 무산시킨 다음 이러한 사건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말해줄 수 있는 건축물을 공모하였다.
여기에 조경가와 건축가인 Diller Scofido & Renfro는 농업(Agritculture)와 건축( Architecture) 를 화합시킨 어그리텍쳐(Agritecture)란 새로운 개념의 건축으로 응답해왔고 하이라인의 친구들은 이 응답을 환영했다.
하이라인을 다시 건축한 기술은 그것을 그저 야생으로 방치하지 않고 다시 보듬으며 이러한 사건이 갖는 의미를 가다듬어 내었다. 이는 바로 어그리텍쳐란 건축방식으로 구체화된다. 그것은 “식물 소재로 대변되는 자연과 콘크리트로 대변되는 인공이 제약 없이, 점진적으로 얽히며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려는” 목적을 갖는 것이다. 이 건축에 참여했던 윤희연의 증언에 따르면 철로 이용 중단 후 그곳에서 무성하게 자란 잡초도 그 고유의 미적 가치가 높다는 판단으로 씨앗 수확 과정을 거쳐 다시 심었다고 한다. 이는 그저 요즈음 유행하는 생태건축의 또 다른 유형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행위는 하이라인을 심오한 풍경현상학적 의미로 빛나게 한다. 대지에 적대적이며 파괴적이었던 근대도시의 인공물이 대지의 역사의 한 지층으로 흡수되어 대지의 역사성을 풍요롭게 했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풍요로워진 대지로부터 새로운 식생이 일어날 수 있는 터를 열어놓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하이라인은 무를 향해 삭아 들어가는 철도의 산화과정을 하늘, 땅, 죽을 운명의 인간, 그리고 신성함으로 이루어지는 풍경이 창조되는 기다림의 과정으로 반전시킨다. 그리하여 풍경을 그곳에 사는 인간들에게 안겨준다. 동시에 그들을 그곳에 거주하게 함으로써 거주의 의미를 풍경에 귀환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귀환은 마치 실낙원으로 되돌아가듯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원시적 자연 풍경을 향한 것이 아니다. 이점에서 하이라인은 극단적 환경론자의 극단적 무위의 자연주의와 다르다. 하이라인은 풍경에 그 풍경을 파괴했던 근대의 거대기계, 철도를 땅의 한층 더 두터워진 나이테로 새겨 넣으며 풍경의 고유한 요소들이 그 요소로서 다시 활성화될 수 있는 길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하이라인은 결코 인간의 기술이 존재한 적이 없는 절대적 원시 자연을 이상화하지 않는다. 또 근대기술을 악마화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근대건축을 용서하고 풍경의 요소로 그 존재방식을 탈바꿈시키며 건축과의 상호창조를 통해, 하늘, 땅, 죽을 운명의 인간, 신성함, 즉 사방이란 풍경의 의미가 드러나는 길로 소생시킨다.
그리하여 적어도 이곳에서 뉴욕의 시민들은 그들의 도시를 포기하고 전원으로 귀향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거기서 그들은 인간의 어그리텍쳐라는 새로운 건축행위를 통해 자연과 상호창조의 과정으로 탈바꿈한 도시 풍경에 거주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들은 도시수송체계의 부속된 철도에서 풍경 속의 길로서 존재를 회복한 그 길을 거닐며 명상하고 담소하고 이제 문턱을 넘어 집으로 들어 온 사람처럼 평안을 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향상실의 시대를 지탱하는 산업기반시설이었던 하이라인은 이제 거주를 선사하는 고향을 향한 길이 된 것이다.
나아가 하이라인은 진정한 의미의 트랜스포매션(Transformation)기술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트랜스포매션 기술은 이미 렘 쿨하스(Remment Koolhaas)같은 소위 스타 건축가가 서울 경희궁에 프라다관을 지으며 미래의 건축과 도시를 예언하는 이벤트인양 주목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트랜스포메이션 건축은 현대 최첨단 기술을 총동원하여 다양한 기능적 요구에 따라 형태를 무작위로 변형시키는 건물일 뿐이다. 이때 건축물은 요구되는 기능을 가능한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첨단 기계에 불과하다.
그보다 더 첨단화되고 지능화된 최첨단 건축개념이 동대문 DDP를 건설한 자하하디드 소속 엘리트 건축가 패트릭쉬마허에 의해 선언된 적이 있다. 이른바 파라메트릭 건축! 그에 따르면, 컴퓨터 나아가 인공지능 덕분에 그리고 나노기술에 기반한 최첨단 재료공학에 의해 우리는 필요에 따라 건축물을 자유자재로 변형시키고 이동시키는 건축의 유동적 트랜스포메션을 미래의 도시 풍경으로 구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하이라인이 보여주는 트랜스포매션은 존재론적 트랜스포매션이다. 더 이상 기계로서 존재할 수 없는, 그래서 테크놀로지의 공간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버려진 과거의 거대기계, 그 산화해가는 철도를 땅이 품어 풍경의 요소인 땅의 존재로 살려낸 것이다. 그리하여 거기서 마법처럼 새로운 존재자들이 움트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마법이 아니다. 건축이 인간과, 건축 그리고 자연의 상호창조적 관계로 돌아온, 그리하여 풍경과 호흡을 시작한 건축 행위일 뿐이다.
이렇게 하여 하이라인은 미래를 향한 길을 아슴푸레 열어준다. 미래는 근대나 탈근대의 오류를 벗어나기 위해 근대나 탈근대를 부수고 원시의 숲으로 퇴행할 필요가 없다. 또 최첨단 기술을 동원하여 제작된 변신로봇 같은 건물들이 들뢰즈가 찬미하는 주름운동을 하며 우글대는 도시도 아니다. 하이라인은 근대의 공간이 최첨단 기술을 동원하는 건축을 통해 어떻게 sympoietic 미래로 거듭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뉴욕! 뉴욕!
지난 3년 우리는 코로나 팬더믹이란 대재앙의 습격을 받았다. 그 재앙은 전세계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급속히 창궐하여 인간의 호흡기에,숨통에 치명상을 입혔다. 그 도시의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마치 기술철학자 루이스 멈포드가 20세기에 메크로시티(100만 도시)는 네크로시티(죽음의 도시)라고 경고한 것이 현실이 된 것 처럼... .
사실 21세기 초부터 이미 인간 만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이 호흡에 치명상을 입고 있다는 진단이 있었다. 기후위기 나아가 6차대멸종이 그것이다.
기후위기와 6차대멸종은 철학적 통찰력의 언어로 다시쓰면 우주전체의 호흡, 즉 고대 그리스어로 퓨뉴마 Pneuma가 질식 상태를 겪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호흡을 매개하고 도와주는 것은 바로 식물의 식생이다. 이런 식생이 근대산업혁명이후 대도시의 건축과 건설로 인해 대대적으로 황폐화되었다. 하이라인을 지은 어그리텍쳐는 바로 이 식생을 소생시키려는 조용한 출발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하이라인에서 피어나는 이 풍경은 어쩌면 퓨뉴마의 질식으로 창궐하는 대질병의 시대에서 자그만한 희망의 싹으로 기대해도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내 고향 서울을 그려본다. 이제 돌아갈 때가 된 모양이다.
필자: 이종관
성균관대 철학과 교수. 성균관대 하이브리드 미래문화연구소 소장. 미래인문학 주임교수. 첨단과학기술과 관련된 도시, 경제, 문화 예술 문제를 미래인문학의 관점에서 젊은 연구원들과 함께 연구하고 있다.
주요저서: 포스트휴먼이 온다. 공간의 현상학, 건축, 그리고 풍경. 사이버문화와 예술의 유혹. 디지털 철학 등
13. 라스베가스:욕망과 허무의 스펙터클
2022.06.13. 오후 5:19 by 이종관
우리는 이제 유럽을 떠나 20세기에 이어 21세기를 제패중인 미국으로 왔다. 미국을 여행하는 자는 의무적으로 들러야 할 곳이 있다, 라스베가스이다. 우리도 그랬다. 사막 한 가운데의 도시 라스베가스를 찾아 왔다.
1990년대 중반, 인류가 20세기를 떠나려 할 즈음, 한 영화가 있었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블록버스터는 아니었지만 당시 젊은 관객들의 관심을 끌었던 영화였다.그리고 이 영화만큼 라스베가스란 도시의 영혼을 잘 드러낸영화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잠시 이 영화에 머물면서 이 영화와 도시의 광경을 교차시키며 라스베가스라는 도시의 정체를 밝히기로 한다.
선정적이기도했던 이 영화에는 창녀와 알코올 중독자가 등장해 관객을 적절히 흥분시키는 성애 장면을 노출시킨다. 그리고 그들의 퇴폐적 행각이 일어나는 곳은 바로 향락의 도시 라스베이거스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촬영 기법에서 단순 오락영화의 고정 문법을 조금씩 벗어난다. 다른 대중영화와는 달리 이 영화는 몽타주나 인과적 시퀀스가 상당히 절제되어 있다. 차분한 미장센과 롱테이크 기법에 의해 가끔씩 적절히 파편화되며 시적 이미지로 흩어진다. 그러면서 쇼트와 쇼트는 때로는 완전히 일상으로부터 미끄러지는 퇴폐처럼, 때로는 폐부를 스미며 일상의 깊은 곳을 더듬는 시원의 소리처럼, 영화에 흐르는 스팅의 목소리와 재즈 선율을 따라 끊어질 듯 이어지며 연결된다.
한편 화면은 때때로 초점을 잃은 듯 모호해지며 명확한 지시의 영역을 떠난다. 그럴 때면 카메라는 현실의 명확한 재현이라는 도구적 기능을 포기한 채 자유롭게 움직이며 아스라한 이미지의 세계를 드러낸다. 대사도 긴 산문적 형태보다는 짧게 읊조려지며, 독특한 화면 이미지는 스팅의 짙고도 허무한 목소리에 미끄러지듯 실려 다닌다. 그러면서 이 영화는 현대인이 겪는 위반적, 일탈적, 탈출적 사랑 이야기를 펼쳐낸다. 특히 카메라가 주인공들과 함께 라스베이거스를 자유롭게 때로는 흐릿한 초점으로 방황하면서 …….
이 영화의 주인공 벤, 그는 실직 후 라스베가스로 와서 어떤 콜걸과 사랑에 빠지다 라스베가스에서 세상을 떠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라스베이거스인가? 그리고 왜 이 환락의 도시에서 죽음인가? 그리고 왜 죽음 앞에서 창녀와의 위반적 사랑인가? 이 영화는 바로 라스베이거스를 비추기 때문에, 스스로 죽음으로 앞서 가는 인간을 따라가기 때문에, 또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방치하는 창녀의 비정상적 사랑 때문에 풍경의 현상학을 관객으로 불러들인다.. 라스베이거스에 묻혀 있는 ‘장소의 영혼’이 무엇이기에 그곳에서 영화의 주인공 벤 같은 영혼이 나타나는 걸까.
라스베가스는 미국이 자랑하는 관광지이다. 수천 개의 객실을 운영하는 대형 호텔이 호화로움을 뽐내며 늘어서 있고, 또 그 호텔의 안과 밖에는 카지노가 즐비하다. 라스베가스에 오면, 그래서 라스베가스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스트립Strip을 걷다보면, 어느새 카지노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라스베가스에 머물면 누구나 도박을 하고 싶고, 또 도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곳은 한마디로 도박이 거주자의 삶과 의무인 도시이다.
밤이 오면 호텔과 카지노에는 짜릿한 관능을 발산하는 쇼걸과 바니걸들이 곳곳을 활보하며 금욕주의자조차 매혹하고 유혹한다. 여기저기서 한탕 대박의 꿈이 넘쳐나고 희열의 웃음과 무희의 스트립 댄스가 끊이지 않는 라스베가스. 그래서 라스베가스는 욕망이 넘쳐나고 그 욕망이 또 다른 욕망을 꿈꾸는 곳이다.
그곳은 또 어둠을 허락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쾌락과 환락이 있어야 할 뿐이다. 때문에 그곳은 밤에도 현란한 네온사인에 의해 밝혀지며 어둠과 고요함을 탕진한다. 또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위대한 건물들을 홍보하는 관광포스터가 무작위로 잘려져 콜라주된 듯 어디서 이미 보았고 어디서 본 듯한 역사적 건물들이 곳곳에서 우리의 시선을 현혹한다.
어떤 곳으로 눈을 돌리면 로마에 있어야 할 건물이, 또 어떤 곳으로 눈을 돌리면 파리에서 본 것이 틀림없는 철제 탑이 환영처럼 떠 있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면, 이집트에 있어야 할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더욱더 스펙터클하게 다가온다. 또 어느 곳으로 들어서면 베네치아의 풍경이 펼쳐진다. 그러나 그렇게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여지없이 네온사인이 섬광으로 번쩍이며 그곳이 호텔이라는 것을 눈부시게 알린다.
우선 스프링마운트로드에서면 그 이름도 위대한 시저스팰러스호텔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호텔은 1996년 고대 로마를 테마로하여 라스베가스 스트립에 처음으로 리조트처럼 지어진 호텔이다.
시저의 동상이 카리스마를 포기하고 벨보이처럼 방문객을 맞이하는 이 호텔에는 콜로세움과 흡사한 외양의 카지노가 있다. 이 카지노는 검투사와 맹수의 사생결단보다 더 단말마적인 흥분을 약속하는 듯 방문객을 끌어들인다.
카지노를 나와 대각선 방향으로 눈을 돌리면 세련된 파리지안느들이 기다리고 있는 듯한 라스베가스 파리호텔이 에펠탑과 함께 우리를 부른다.
파리호텔은 이름 그대로 프랑스 파리를 그대로 모방한 호텔이다. 에펠탑과 개선문, 그리고 오페라 하우스, 루브르 박물관과 같은 파리를 상징하는 상징물들이 한곳에 모여 있다.
거기서 다시 대각선 아래 방향으로 내려가면 룩소란 이름의 호텔이 거대한 모습으로 여행자를 기다린다. 36층의 높이로 4천개의 객실을 운영하는 이 호텔은 검은색피라미드 형태로 지어져 더욱 더 위압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발레파킹 입구에는 10층 건물 높이의 스핑크스가 모조품임을 적나라하게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 거대한 규모는 통상 모조품에 대해 갖는 경멸의 시선을 순식간에 잠재우며 방문자를 경악과 경이에 빠뜨린다
뿐만 아니다. 우리의 시선을 처음 사로잡았던 시저스 팰러스 위쪽 대각선 방향으로는 베네치아의 낭만을 상기시키는 베네치안 호텔이 보인다.
이 호텔은 우리가 지난 12회의 여행에서 머물렀던 베네치아 산 마르코 광장에 위치하고 있는 건물들을 통쨰로 이전시켜 놀이터의 기구인양 재배치했다.
호텔 안으로 들어가면 베니스처럼 인공으로 만들어진 운하가 있고, 이 운하를 따라 곤돌라가 다닌다.
1999년에 건축된 이 호텔 역시 35층의 높이를 자랑하며 3천 개가 넘는 객실을 운영하는 대규모 호텔이다.
이렇게 라스베가스는 이집트, 로마, 베네치아, 그리고 파리처럼 우리가 가보고 싶은 모든 장소를 역사의 흐름을 잠식해버리고, 동시에 한 곳으로 강제 이주시킨 듯하다. 또 고대, 중세, 근대라는 역사의 스토리가 탄생한 장소를 마멸시키고 어지럽게 뒤섞인 듯하다. 그러나 이 어지러움 속에서 라스베가스는 환영과 스펙터클, 그리고 향락 사이를 오락가락 한다.
그러나 라스베가스는 원래 향락과 스펙타클이 신기루처럼 피어오르는 환영의 도시가 아니었다. 네바다 사막 한가운데 있는 그곳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그 자체로 사막인 곳이었다. 바로 그 라스베가스에 본래 그곳이 고향이 아닌 모든 것이 현대기술에 의해 총동원령이 내려진 듯 집결되어 있다. 오늘날 라스베가스를 장식하고 있는 모든 모조품의 장식성은 순수예술에 대해 오히려 성서 같은 위력을 발하고 있다. 널리 알려진 포스트모던 건축의 기수 로버트 벤추리는 “라스베가스에서 배우자!”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그 라스베가스는 존재의 역설이 클라이맥스에 이른 도시이다. 그곳은 고향상실의 시대의 상태가 극단화된 가공의 도시이다. 모든 것을 황폐화시킨 현대가 원래부터 사막이었던 그곳에 눈을 마비시키는 현란함으로 본래의 황폐함을 덮어버린 곳. 그곳이 라스베가스이다. 마치 현대에 의해 도처에서 진행된 존재의 황폐화를 은폐하려는 듯, 어쩌면 현대는 라스베가스를 통해 황폐함이란 사막의 본래 풍경마저 황폐화시켜 아름답게 가공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라스베가스는 고향상실이 극단화된 곳이다.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그곳은 자연적인 사막마저 남겨 놓지 않고 본래의 풍경을 총체적으로 황폐화시키는, 참을 수 없는 황폐화의 현장이다. 그러나 그 거대한 황폐화는 본래의 황무지를 현란하게 황폐화시킴으로써 다른 곳이 황폐화되었다는 사실을 감추어 버린다. 오히려 사람들은 기계처럼 작동하는 현대 사회조직의 부품으로서의 존재가 잠시 정지할 때, 그리하여 자신의 존재를 되돌아볼 수 있는 휴식의 시간이 주어질 때, 마치 그곳이 자신의 존재의 고향인양 라스베가스에 모여든다. 저마다 자기성을 빼앗기는 거대한 황폐화란 상처의 시대에 그곳에서 위안을 얻으려는 듯…. 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황무지에 현대기술을 총동원한 그곳은 고향상실 시대의 존재자들이 구원과 안식을 찾는 휴양도시이다. 라스베가스는 그 자체로 오늘날의 삶이 비추어지는 스크린이다.
현대인들은 거대 조직의 부품으로 존재하면서 탈취당한 자신의 존재와 그 보금자리를 황무지 위에 세워진 가공의 도시 라스베가스에서 찾기를 원하며, 휴가가 오면, 즉 주문이 잠시 정지되면, 그곳으로 향한다.
하지만 그곳은 상실된 자신의 존재를 찾을 수 있는 존재자의 보금자리가 아니라, 고향상실의 존재자들이 뜬구름처럼 모였다가 흩어지는 고향상실의 극단이다. 그곳에서 존재의 뿌리를 내릴 자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라스베가스에 오면 라스베가스를 떠나야 한다.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의 주인공 벤. 그는 이 화려한 도시에 멎진 차를 몰고 이 온다. 그러나 그에게는 보다 처참한 상처가 있다. 제법 촉망받던 할리우드의 시나리오 작가인 그는 어느 날부터 용도를 상실한 인간으로 퇴출당하며 폐기처분 당한다. 그는 어디에도 부속될 수 없는, 또 주문되지 않는 존재자로서 존재성을 상실한 백수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가정마저 파탄시켰다. 그런 그가 바로 위안을 받기 위해 떠나는 곳은 모든 사람이 위안을 욕망하는 라스베이거스. 하지만 그곳은 상실된 자신의 존재를 찾을 수 있는 존재자의 보금자리가 아니라 고향 상실의 존재자들이 뜬구름처럼 모였다가 흩어지는 고향 상실의 극단이다.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존재의 뿌리를 내릴 수 없다. 그곳은 곧 죽음인 것이다. 때문에 라스베이거스에 온 사람은 라스베이거스를 떠날 수밖에 없다.
사실 벤은 알았다. 그도 라스베이거스에 오면 라스베이거스를 떠날 수밖에 없음을. 거대 부품 체계로 존재하는 현대 세계에서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음을. 그는 폐기물 처리장으로 보내져야 하지만 죽음을 현란한 빛으로 위장한 그곳에서 자기 존재의 끝으로 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이미 라스베이거스로 향할 때 죽음을 향해 앞서 달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더욱 재촉하기 위해 술을 마신다.
모든 것이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리고 부속품으로 총동원되어 존재의 빛을 잃어버린 창백한 죽음의 도시. 그래서 더없이 창백한 죽음의 모습을 현란한 인공 빛 화장 아래 감추고 있는 라스베이거스. 그곳에 또 하나의 존재자가 짙은 화장을 한 채 나타난다. 세라. 자신의 몸 이외에는 아무것도 거대 주문 체계 안에 제공할 수 없는 여자. 결국 그녀는 몸이 끊임없이 주문되는 상황에 자신을 내맡기며 라스베이거스에 온다. 하지만 그녀도 라스베이거스를 떠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문과 부품체계에서 완전한 일탈을 꿈꾸는벤. 그리고부품체계의 주문관계에 자기 몸마저 내맡긴 콜걸 세라. 그들은 이 곳 현란한 고향상실의 도시, 화려한 죽음의 도시에서 만난다. 이 라스베이거스에서 세라는 자신의 고유한 이름이 없다. 그녀는 단지 주문되는 여자일뿐. 때문에 주문자에 따라 아무렇게나 불려도 좋은 비어있는 존재자일뿐. 그런 세라에게 벤은 이름을 불러준다. 그러자 세라는 벤에게다가와 천사가 된다. 벤이 세라의 눈을 들여다 볼 때스팅은 <천사의눈Angel Eyes>을노래한다. 그리고 둘은 비어있는 존재를 서로 채워주며 다가간다.
벤은 세라에게 그녀를 주문하는 다른 고객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죽음으로 달려가기 위해 라스베이거스에서 끊임없이 술을 마시는 벤.
그녀는 결국 벤의 결정을 장악하지 않는다. 이 황폐화의 시대에 어디에서도 존재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는 듯이 말이다.
결국 벤은 죽는다. 희열의 도시 라스베이거스에서. 그리고 벤은 라스베이거스를 떠났다. 스팅의 노래처럼 라스베이거스는 “It’s a lonesome old town”이었던 것이다. 아니,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는 모래 바람만 스치고 지나가는 황량한lonesome old town인지도 모른다. 원래 라스베이거스처럼 ……. 현란한 빛의 조명 속의 라스베이거스, 아니 우리의 시대는 세계의 밤Weltnacht, 존재의 어둠 속으로 침몰하고 있는지 모른다.
어둠이 내린 지구를 인공위성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가장 밝게 빛나는 지역이 라스베이거스이다.
그러나 이렇게 밝게 빛나는 라스베이거스는 사실 이 현대라는 시대가 어떻게 자연과 인간을 자원화해서 에너지로 소비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쇼케이스이다. 현란한 빛의 제국 라스베이거스는 사실 가장 암울한 미래의 도시가 아닐까? 지구가열화의 극단으로 달려가는... .
이제 우리는 라스베가스를 떠난다. 그리고 뉴욕으로 향한다. 희망을 보기 위해?
필자: 이종관
성균관대 철학과 교수. 성균관대 하이브리드 미래문화연구소 소장. 미래인문학 주임교수. 첨단과학기술과 관련된 도시, 경제, 문화 예술 문제를 미래인문학의 관점에서 젊은 연구원들과 함께 연구하고 있다.
주요저서: 포스트휴먼이 온다. 공간의 현상학, 건축, 그리고 풍경. 사이버문화와 예술의 유혹. 디지털 철학 등
12.남프랑스: 고향이 예술이 된 풍경
2022.06.12. 오전 11:48 by 이종관
남프랑스, 모든 사람들이 한 번은 가보고 싶어 하는 지상의 이상향!
4월에 그곳을 향하면 아마폴라가 가득 핀 들판을,
6월에 그곳을 향하면 라벤다가 만발한 들판을 가로지르게 된다.
마치 그곳이 원래 누구나의 고향인 듯 아늑한 영혼으로 사람들을 반기는 곳.
하지만 꼬드아쥬르와 프로방스로 대표되는 이 지역은 라스베가스와 같이 모든 것이 휘황찬란하게 장식되어 있는 곳이 아니다. 또 디즈니랜드처럼 온갖 최신 놀이기구가 사람들을 유혹하는 곳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 지역은 사람들이 가장 동경하는 관광지이다. 사람들이 이곳에 가고 싶어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남프랑스가 세계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엽의 상황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 시기는 근대가 완성됨과 동시에 근대의 역사가 다른 방향을 모색하던 역사적 전환기였다. 그리고 그 전환의 모습은 예술에서 처음으로 드러났다. 특히 미술은 이러한 새로운 방향의 모색이 가장 눈에 띄게 드러나는 영역이다. 그런데 그때 수많은 화가와 예술가는 바로 남프랑스에 매료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그곳으로 향하였다. 새로운 시대를 향하는 그들의 창작력이 마치 이곳 남프랑스에서 길어내질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은 이곳에 모여들어 거주했으며 그리하여 그들의 창작력은 이곳을 예술적으로 작품화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세잔느는 엑상프로방스에서,
피카소는 앙티브에서,
샤갈은 생폴드방스에서….
고호는 아를에서
화가들뿐만이 아니다. 시인과 소설가도 이곳이 아니면 영감을 얻을 수 없다는 듯 이곳을 떠나지 않았거나 이곳으로 돌아왔거나 이곳을 그리워하였다. 이곳에는프로방스를태양의 제국으로 노래한 미스트랄이 있는가 하면, 이제는 더 이상 쓸모없는 불구의 시설에 불과하던 퐁비이에의 풍차를 손 하나 대지 않고 예술작품으로 탈바꿈시킨 알퐁스 도데가 있다.
그리고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마을과 고향의 본질을 바로 프로방스에서 일깨워준 르네 샤르도 있다. 때로는 역사를 장식하는 위대한 예술가와 때로는 이름도 없이 거리를 헤매던 화가와 시인들은 바로 이 남프랑스에 자신들의 삶의 절정을 뚜렷하게 각인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그렇게 예술이 각인된 남프랑스는 다시 그들의 과거를 예술적 분위기로 발효시킬 수 있었다.
이 뿐만이 아니다. 프로방스 곳곳에 남아있는 중세의 폐허는 사라진 역사의 비장미를, 또 중세도시에 바탕을 둔 도시의 미로는 삶의 미스터리를, 바로 그 도시의 품 안에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함께 펼쳐낸다.
이러한 분위기는 첨단 소재의 고층건물로 구축되어 어떤 세월의 풍화작용도, 또 어떤 허물어짐도 허용하지 않는 현대도시가 결코 모방할 수 없는 분위기이다.
레보 그리고 샹 아그네 같은 도시는 중세의 모습을 세월이 남긴 폐허를 흘러가는 시간의 작품으로 보존하듯 허물어진 채로 남아있다.
또 끊어진 다리 마저 예술 작품이 되는 아비뇽과 님과 같은 곳에서는 현대가 결코 중세를 압도하지 않고 절묘하게 중세의 도시 구조 속으로 숨어들어 화해를 이루고 있다.
이들 도시의 미로를 따라 거닐면 곳곳에 숨어있는 상점과 식당들조차 우리를 아늑하게 끌어들인다. 거대도시에서 현란한 광고판과 상업주의의 공격에 허우적거리며 느낀 기만의 불쾌감은 이 남프랑스의 도시에서는 사라진다.
이 도시의 미로를 따라 늘어선 상점을 기웃거리며 걸으면서 사람들은 쇼핑을 목적으로 한다기보다는 어떤 미스터리를 향해 산책을 한다.
먼 곳에 온 이방인들, 특히 현대를 사는 이방인들은 이곳에 오면 매료된다. 그들이 사는 삶의 공간과 다른 분위기에 사로잡히는 이곳에서 그들은 아릿한 향수를 안고 되돌아간다.
그런데 이 아릿한 향수의 원천은 과연 어디일까?
이를 밝혀내기 위해 남프랑스의 풍경을 풍경현상학을 통해 한번 굽어보자.
우선 남프랑스의 풍경을 사물의 측면에서 접근하면, 그 풍경의 특성의 결정하는 사물들이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가장 먼저 남프랑스 풍경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으로, 문자 그대로 우뚝 서는 것은 그 지역의 진정 독특한 산이다. 바로 생트 빅투아르 산이다. 이 산은 풍경에 모습과 성격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하늘과 땅이 만나는 산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남프랑스 풍경의 성격을 결정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엑상프로방스의 화가 세잔느가 바로 이를 증언한다. 그는 자연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그리는 원근법을 거부하고, 풍경이 그 자신 속에서 생각하고 결국 풍경이 풍경을 그리는 상황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생트 빅투아르 산이 이루어내는 풍경은 그를 사로잡아 무려 80여점 이상의 풍경화가 그를 거쳐 탄생한다.
사실 생트 빅투아르 산은 남프랑스 풍경의 절정이라 할 만큼 높지는 않다. 대략 천 미터의 높이로 과거 인간에게 결코 오를 수 없는 무한한 영역으로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던 세계적 고산의 기준에서 보면 비교적 낮은 산이다. 물론 이 산의 높이도 인간의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수용이 가능한 높이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생트 빅투아르 산은 육중한 느낌을 주는 석회암과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는 바위산이다. 더구나 이 석회암과 대리석은 이 산의 육중함에 적나라한 표현력을 부여한다.
하얗게 빛나는 생트 빅투아르 산에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태양빛이 부딪치면, 그 산은 빛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명암대비와 광채로 변신을 거듭하며 주변을 압도한다. 나아가 석회암 바위들이 이루어내는 표면의 거친 질감은 격렬하게 꿈틀거리는 신비한 대지의 힘을 뿜어내는 듯하다.
하지만 태양이 저물고 달빛이 내리면 생트 빅투아르 산은 연약한 사랑에 스스로를 길들이는 야수처럼 고요함으로 젖어들며 달빛의 은은함을 어슴푸레 반사한다.
오스트리아의 시인 페터 헨케는 이 산을 그리스 신들이 신탁통치했던 델포이와 비교하며 묻는다.
“세계의 중심은 델포이 같은 곳이 아니라, 한 위대한 예술가가 일한 이곳이 아닌가!” 그리고 이 산에 대한 인상을 다음과 같이 옮기고 있다. “산은 벌거벗고 거의 단색이고 색깔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눈부신 광채이다. 우리는 가끔 구름의 윤곽을 높은 산으로 혼동한다. 여기서는 완전히 반대로, 찬란한 산은 첫눈에 하늘로부터 솟아난 것 같다. 세월 이전의 한 시간에, 나란히 떨어지는 바위의 측면과 산 뿌리에 수평으로 파고드는 단층들이 응결되는 듯한 운동이 그러한 효과가 있다. 산은 하늘에서 주위의 대기와 거의 같은 색깔이 흘러내린 것과 같은 인상을 주고, 또 우주공간의 작은 덩어리로서 여기에 눌어붙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생트 빅투아르 산과 함께 남프랑스의 풍경을 결정짓는 것은 나무다. 이미 우리는 풍경의 성격을 결정하는 사물을 논할 때 산과 함께 나무를 풍경의 중심사물로 일컬었다. 마치 이를 예증이라도 하듯 남프랑스이 풍경은 남프랑스의 땅을 현저하게 뒤덮고 있는 한 종류의 나무에 의해 그 풍경의 독특성을 발한다. 우리는 남프랑스의 어느 곳에서나 올리브나무 숲과 마주친다. 올리브나무는 사계절 푸르름을 잃지 않는 수종이다.
이 올리브나무의 푸르름에서 하늘과 땅의 평화롭고 비옥한 만남이 풍경 속에 스며든다. 그러나 이 나무는 거침없이 뻗지 않으며 절묘하게 비틀어져 있다. 이는 그 평화와 비옥함이 그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늘 그 내면에서 고통을 견뎌냄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따라서 올리브나무 숲은 그 지역의 풍경을 평화와 비옥함의 초록으로 감싸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평화와 비옥함과 함께 곡절과 아픔, 또 이 지역을 가끔씩 폭군처럼 휩쓸고 지나가는 미스트랄 바람을 내면으로 받아내며 견디는 힘든 삶의 풍경을 보여준다. 올리브나무가 바로 계절풍 미스트랄을 견디어 내고 그것을 자신의 내면에 새겨 그 지역의 풍경을 모으고 있기 때문이다. 계절이 바뀔 때 마다 평온한 이곳에 출현하며 폭력과 긴장을 만들어 내는 미스트랄, 특히 겨울의 미스트랄은 비교적 온화한 이 땅에 더욱더 매서운 공격성을 보인다. 이 역시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이 결코 고통과 결별할 수 없음을 일러준다.
마지막으로 남프랑스의 풍경을 바로 그것으로 만드는 풍경의 중요한 요소는 물이다. 이 역시 남프랑스에서 물이 바로 풍경을 결정하는 사물중의 사물임을 부인할 수 없게 한다. 그것은 바로 지중해이다. 지중해는 바다이지만 비교적 평온을 유지하며 물의 원초적 성격을 간직하고 있다.
즉 모든 존재하는 것의 생명력을 적시듯 생명의 생명성을 키워가는 물의 이미지는 지중해가 이곳 풍경을 더욱 생명력 있게 만드는 결정적 요인이다. 나아가 형언이 불가능할 정도로 청명한 색깔로 풍경을 물들이는 지중해는 이 지역 풍경에 투명성을 부여한다.
물론 지중해도 바다이기 때문이 인간이 알 수 있는 한계의 범위를 넘어서고, 그래서 때로는 불안과 공포의 장엄함을 풍경 속에 담고 있다. 하지만 지중해는 또 비교적 호수 같은 바다라는 점에서 지역 풍경의 평온과 투명성을 상승시킨다.
특히 이태리 산레모와 가까운 레몬의 마을 망통Manton이나 니체가 거닐며 짜라투스트라의 영감을 얻었던 에즈Eze에서 드러나는 지중해의 광활한 트임, 그리고 그와 함께 바다에 떨어져 내리는 태양빛은 수면 위에서 푸른 광휘로 퍼져나가고, 그 광휘가 반사되며 다시 빛과 함께 무한 반복적으로 상승할 때, 풍경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의 모든 잠재력이 엑스타시에 이르는 것처럼 고조된다. 특히 상트로페Saint Tropez에서 니스Nice를 거쳐 망통Manton에 이르는 남프랑스의 풍경은 보는 자를 흥분시키며, 모든 존재하는 것이 클라이맥스에 이르는 듯한 관능성을 발휘한다. 때문에 이곳에서는 우리의 몸도 그렇게 감응한다.
이제 우리는 풍경의 영혼을 찾아 떠난 유럽 여행을 마치고 미국으로 떠난다. 미국에서는 우리는 딱 두 곳만을 들를 것이다.
필자: 이종관
성균관대 철학과 교수. 성균관대 하이브리드 미래문화연구소 소장. 미래인문학 주임교수. 첨단과학기술과 관련된 도시, 경제, 문화 예술 문제를 미래인문학의 관점에서 젊은 연구원들과 함께 연구하고 있다.
주요저서: 포스트휴먼이 온다. 공간의 현상학, 건축, 그리고 풍경. 사이버문화와 예술의 유혹. 디지털 철학 등
11.시에나,베니스: 광장에서 다가오는 풍경의 영혼
2022.06.11. 오후 1:13 by 이종관
피아짜!
도시의 광장을 일컫는 이태리 말이다. 광장, 넓은 면적의 공간.그러나 이탈리아 도시에서 우리를 환대하는 이 광장들은 단순히 넓은 공간이 아니다. 대체 광장이 넓은 공간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제 광장을 우리 여행의 길잡이 풍경 현상학을 통해 잠시 사색해 보도록 하자.
광장은 도시의 모든 만남이 실질적으로 자리 잡는 장소이다. 가로를 따라 전개되는 풍경, 그리고 그 풍경을 거쳐오는 보행자는 도시의 중심인 광장으로 흘러 들어 온다. 이곳에서 풍경들은 한데 모이고, 다시 가로를 통해 퍼져 나간다. 마찬가지로 보행자도 가로를 따라 진행한 도시의 다양한 풍경의 탐색을 멈추고, 휴식을 취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며, 다양함 속의 이 거주 공간에 같이 속해 있음을 만끽하며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 따라서 광장은 가로보다 강력한 통일성과 사람들의 공속감을 제공한다. 그리고 가로를 따라 움직이던 인간은 광장에서 그 발걸음을 멈추면서 머무름과 휴식 나아가 만남의 내용에 대해 사유한다. 따라서 광장에서는 가로를 따라 흩어져 있는 것들이 복합적이면서도 포괄적인 이미지로 응축된다. 이렇게 하여 도시 거주자들의 관계가 공동체로 각성된다.
이제 이러한 광장의 의미로부터 가로를 되돌아보면 가로는 단순히 광장으로 인도하는 통로가 아니라 광장과 같은 초점과의 관계에서 비로소 의미를 갖고 가로로서 열려진다. 예컨대, 유럽의 역사도시에서 가로는 도시 내부공간의 초점으로 모여들고 흘러나가는 형태를 취한다. 따라서 이렇게 도시의 초점과 관계를 갖고 있는 가로들은 단순히 사람과 물건의 운송로가 아니다. 가로들은 이러한 초점을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그 초점으로부터 퍼져 나온 공동체의 형성 의미가 시적 운율처럼 변주되며 전체 거주지로 스며드는 길로 나타난다. 그리고 동시에 그렇게 도시의 내부로부터 길을 타고 퍼져나가는 의미들은 도시의 경계를 한계로 외부 풍경과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도시의 형태를 결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도시의 길들은 다른 한편으로는 외부 풍경의 의미들이 어떻게 도시의 관문을 넘어 내부로 전이되는 지를 보여준다. 도시의 미로는 내부 중심으로부터 퍼져나가는 의미들과 외부로부터 밀려 들어오는 의미들이 어떻게 화음을 이루는지 예시하는 것 같다.
베네치아:
베네치아! 아주 오래전 거의 지금 부터 거의 70년 전 쯤 베니치아를 여행하는 한 여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가 있었다.
여정, 원어로는 Summer Time in Venice 인 이 영화. 또 만도린과 아코디온 연주가 은은히 흐면서 Jerry Vale이 감미로운 목소리로 I dream of the summertime, Of Venice and the summer time. I see the cafes, the sunlit days With you, my love.이라고 읇조리는 OST를 잊을 수 없는 영화. 이 영화에서 베니스는 왜 꿈과 추억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니체도 고백했다. "나는 행복과 남쪽을 공포의 전율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이때 니체에게 전율토록 행복을 선사한 남쪽이 바로 베니스였다.
뿐만 아니다. 베니스는 18세기 19세기 영국의 귀족들과 젠틀맨들의 자제들이 교양인으로 지위를 얻기 위해 떠나는 그랜드 투어에서 반드시 들려야 할 순례지이다.
이런 베니스를 슐츠는 미로와 도시의 중심으로서의 광장이 절묘하게 시학적 역할을 이루어내는 도시로 그 풍경의 영혼을 발견한다. 특히 베니스의 성마르코 광장은 한편으로 오밀조밀함의 극치를 과시하고 있는 베니스시의 미로와 다른 한편으로 남쪽의 낙천적 태양을 만나 보석처럼 빛나며 광활하게 트여있는 바다 사이에 존재한다.
그리하여 성마르코 광장에서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풍경의 의미가 조우하면서 서로에게 전이 되는 가운데 이렇게 어우러진 의미들은 광장의 다른 쪽 측면으로 미로를 타고 베니스 시로 흘러드는 것이다.
이렇게 흘러드는 풍경의 의미는 베니스의 수로에서 시적 변주의 절정에 이른다.
바다와 미로가 함께 만들어내는 베니스의 수로는 흘러드는 의미들을 응결시키며 유일하고 독특한 사물을 탄생시킨다. 오직 베니스에만 있는 사물, 결코 다른 곳에는 있을 수 없는 것. 그래서 마카오나 라스베이가스 처럼 다른 곳에 있으면 그 존재가 일그러져 가짜가 되어버리는 사물. 그것은 바로 베니스를 바다도 땅도 아닌 그래서 바로 바다이면서 동시에 땅인 풍경으로 출현시키는 수로, 그 수로의 수면 위를 흑진주처럼 떠다니는 곤돌라이다.
때문에 베니스의 수로는 그냥 수로가 아니며 그 위를 떠다니는 곤돌라는 그냥 배가 아니다. 수로가 베니스란 시의 시구라면, 곤돌라는 시어이다. 곤돌라는 시어처럼 반짝이며 수로라는 시구를 타고 시구들을 이어가며 베니스란 시를 읊어내는 것이다.
베니스의 풍경에서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과 신성함은 결국 곤돌라에서 만난다. 죽을 운명의 인간인 베니스 사람들은 삶의 끝에 도달하여 죽음이 오면 바로 곤돌라를 타고 죽을 운명의 인간을 넘어서 있는 신성한 곳으로 떠나는 것이다.
시에나
이제 우리는 잠시 머무른 베니스를 뒤로하고 광장이 곧 그 도시의 영혼을 형성하고 있는 도시, 시에나로 떠난다.
도시의 중심부는 도시의 자연적 지세를 반영하는 지형학과 기하학이 결합하며 공간조직을 형성할 때 도시적이다. 그리고 이 결합이 화해를 이루며 화합을 구현할 때 도시의 중심부는 도시의 전체공간을 탁월한 방식으로 조직해낸다. 슐츠는 이러한 탁월한 공간조직의 가장 대표적 예로 이태리의 도시 시에나Siena를 든다. 여기서 잠시 시에나 광장에 머물러 보자.
유럽 다른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시에나라는 도시 공간은 광장으로 중심화되며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 광장은 어느 곳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공간 형태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 광장은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란 찬사를 받으며 시에나란 도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날 시에나는 그 도시의 중심부를 형성하고 있는 광장 피아자 델 캄포와 동일시될 정도로 광장을 통해 그 이름을 세계에 알리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광장 때문에 시에나에 모인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도대체 이 광장의 독특한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시에나는 북으로는 피렌체, 남으로는 로마, 서쪽으로는 지중해로 향하는 세 개의 언덕에 조성된 도시이다. 도시의 중심은 당연히 이 세 개의 언덕이 만나는 곳이다. 따라서 만남으로서의 도시공간을 초첨화는 광장은 이곳에 조성되어야 했다. 그러나 세 개의 언덕이 만나는 풍경의 지형적 조건은 곡면과 비탈이 주를 이루고 있는 지세이다. 때문에 수평적 평면을 제공하는 데 인색하다. 그리고 이렇게 수평에 인색한 지형적 조건은 도시의 중심부를 광장으로 조성해내기에 불리하다. 물론 광장을 조성하기 위해 풍경의 지형적 조건을 무시하고 대지를 평탄화하면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시에나에서는 이러한 상투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이 선택되지 않았다. 오히려 풍경의 지형학적 난점은 상투적 공간 조직방식을 탈피하여 시에나의 공간을 여느 광장과는 다른 매력적 공간으로 반전시키는 계기가 된다.
물론 이 반전은 하루아침에 이루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200년이란 역사의 성숙과정을 거쳐 지금의 피아자 델 캄포의 형태로 탄생하며 시에나의 공간을 조직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광장에 시에나 풍경의 지세적 조건인 곡면의 비탈을 존중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 곡면의 비탈과 어울리며 초점으로서의 의미를 상징화하는 기하학적 패턴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패턴은 어떤 것일 수 있을까? 정방형이나 원형일까? 다른 도시에처럼 광장의 공간을 정방형이나 원형으로 조직한다면 곡면비탈에서는 오히려 그 도형의 형태가 왜곡되게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완벽성과 보편성이라는 기하학적 도형의 상징적 효과를 훼손시키는 결과가 될 것이다. 따라서 시에나에서는 원이나 사각형 형태의 광장조성 대신 다른 기하학적 해결방식이 도입된다.
곡면의 비탈은 어느 한 곳으로 수렴되는 흐름의 공간성을 갖고 있다. 이를 선명하게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 경사진 흐름에 기하학적으로 정확히 계산된 부채꼴 모양의 방사형체계를 새겨 넣어 그 흐름이 한 곳으로 모이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에나의 피아자 델 캄포는 오목하게 휘어져 비탈진 지세가 8개의 방향을 따라 한 점으로 수렴되는 부채꼴 형태로 지어진다. 물론 이 8개의 선은 광장이 완성될 당시 시에나의 영향력이 있는 8개의 가문을 상징한다.
그리고 풍경의 지세가 수렴되는 지점에 시청사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시청사는 다시 수직으로 우뚝 선 만자Mansa라는 이름의 탑으로 어디서나 돋보이는데, 이러한 형태를 통해 하늘과 땅을 이어내며 시에나 공간의 흐름을 받아내고 있다.
그 결과 외부로는 로마, 피렌체, 지중해로 뻗어나가는 시에나의 공간적 구조는 내부로는 광장의 흐름에 매개되어 시청사로 집중된다. 동시에 거기서 만자 탑을 통해 하늘과 땅으로 이어짐으로써 보다 선명하게 실존적 공간의 구조를 구현하게 된다. 대지의 지형학과 추상적 기하학은 시에나 광장에서 이렇게 결합하여 화해를 이루며 실존적 공간을 탁월하게 성취하는 것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시에나 광장은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란 찬사를 받는다. 하지만 시에나 광장은 바닥이 빛나는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주변이 화려한 꽃으로 치장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시에나 광장이 아름답다면, 그것이 우리의 미적 감수성을 자극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고 시에나 광장이 하늘과 땅을 그 자체로는 아무 감동도 없는 무미건조한 물질로 환원시키며 오직 넓은 면적의 수용능력이라는 기능만을 제공하는 것도 아니다. 시에나 광장과 건물은 그곳 풍경에 고유한 대지의 지세를 보존하며, 또 대리석 대신 그 지역 대지가 선사한 고유한 흙을 구어 만든 벽돌로 지어져 있다. 따라서 시에나 광장은 찬란한 장식성보다는 짙은 토속성을 드러내며 풍화를 허용한다. 그리고 풍화된 벽돌 바닥과 건물들은 시에나 광장을 대지로 삭아 들어가는 귀향의 분위기로 채색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대지가 그 투스카니 지방의 코발트 빛 하늘과 만나며 그 모습을 드러내고 동시에 그 찬란한 하늘이 대지의 지세가 배어나오는 사발모양의 토속적 광장에 담기듯 내려앉는다. 그럴 때면 시청건물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광장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광장은 이제 캔버스가 되고 서로에게 스며드는 하늘과 땅은 빛과 그림자의 윤무를 통해 스스로에게 붓질을 한다. 하늘과 땅은 시에나에서 인간이 지은 건축물로 중심화되어 서로 만나며, 이 만남의 과정은 광장에 스스로를 풍경화로 드러내는 포이에시스적 사건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시에나 광장의 아름다움은 그곳에서 탁월하게 성취되는 실존적 공간조직에서 샘솟는다. 그것은 감수성을 자극하는 장식적 미학으로는 결코 재현할 수 없는 존재론적․실존론적 사건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거주를 갈망하는 인간들을 끊임없이 불러 모은다. 이에 응답하듯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은 그 광장에 행복하게 자리 잡으며 광장을 향유한다.
이제 우리는 이태리를 떠나 유럽에서 마지막 고귀한 여행의 목적지 남프랑스로 향한다.
필자: 이종관
성균관대 철학과 교수. 성균관대 하이브리드 미래문화연구소 소장. 미래인문학 주임교수. 첨단과학기술과 관련된 도시, 경제, 문화 예술 문제를 미래인문학의 관점에서 젊은 연구원들과 함께 연구하고 있다.
주요저서: 포스트휴먼이 온다. 공간의 현상학, 건축, 그리고 풍경. 사이버문화와 예술의 유혹. 디지털 철학 등
10. 이태리 르네상스와 매너리즘의 풍경
2022.06.10. 오후 7:31 by 이종관
피렌체, 르네상스의 도시!
우리를 환희로 인도했던 중세 후기의 고딕성당들, 그러나 이러한 성당의 형태는 고대그리스의 신성한 건축물이 표현해야하는 피타코라스적 비례 미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특히 고딕 성당들이 경쟁하듯 높이 치켜 세우는 첨탑이 그랬다.
때문에 중세가 저물고 르네상스의 시대가 다가오면서 이러한 성당은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에게 야유의 대상이 된다. 이미 잘 알다시피 르네상스는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으로 그리스 시대를 부활시키려 하였다. 따라서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은 그리스의 예술을 이상화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피타고라스적 비례미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적 비례미의 기준에서 보면 아퀴나스 이후 프랑스를 필두로 지어진 성당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이해가 없는 건물들이다.
따라서 르네상스가 중심인 이태리 지역의 예술가들은 그러한 몰지각한 건축물들을 그들의 선조인 로마인들이 야만인이라 불렀던 고트족들의 무지한 작품으로 폄훼하였다. 고트족의 양식을 의미하는 고딕이란 용어는 이렇게 탄생한다. 우리가 이제 예술사에서 중세후반의 예술적 경향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는 고딕은 사실 불명예스러운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이다. 고딕은 이제 르네상스의 등장과 함께 퇴장한다. 그리하여 첨탑도 쇠퇴한다.
풍경과 거주의 관점에서 르네상스 시대를 보면 기하학적 공간에 대한 신봉으로 특징지어진다. 즉, 르네상스는 형태를 기반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려 했으며, 이때 형태는 기하학적 도형과 동일시되었다. 기하학적 형태는 완벽하게 정의되며 정확한 비례를 확정할 수 있다. 기하학에 대한 신봉은 인간의 이상적 거주지를 상상하는 데 있어서 중세와는 완전히 다른 공간 이미지를 탄생시킨다.
르네상스 시대에 시도되었던 이상 도시는 이를 대표적으로 예증한다.
이에 대해 우리의 길잡이 슐츠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중세의 도시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신의 나라civitas dei를 구체화하고 있기 때문에 이상적인 반면, 르네상스의 도시는 이상적인 형태ideal form를 목표로 하고 있다.”
따라서 르네상스에서 거주 공간의 처리는 순수한 형태라는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살아 움직이는 신의 도시라는 개념으로부터 벗어난다.
르네상스 도시의 내부공간은 기하학적으로 구조화되어야 했고, 가로와 광장은 측정이 가능하며 동일한 단위로 구성된 듯 보이는 건물들에 의해 한정되어야 했다. 기하학적 공간은 형태, 크기 등에 의해 구별되는 도형들의 공간으로서 질적으로는 어떤 차이도 내포하지 않는 동질적 공간이다. 그러나 인간이 사는 공간은 질적으로 무차별적이지 않다. 인간이 사는 공간은 질적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따라서 기하학적 공간도 그 동질성에도 불구하고 질적 공간의 구분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신성한 공간, 공적 공간, 사적 공간 등은 인간의 삶이 진행되는 한 결코 그 차이를 지워버릴 수 없는 것이다.
르네상스 건축의 이론적 기틀을 세운 알베르티Leone Battista Alberti(1404~1472)는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취한 해결책은 형태들에 의미적 위계를 부여함으로써 공간을 질적으로 구분하는 방식이었다. 예컨대 가장 완벽한 형태는 교회가 구현하는 것이며, 공적 건물은 엄격히 자신의 형식원리에 따라 지어져야 한다. 그러나 개인 주택들은 이러한 규칙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이래로 가장 완벽한 형태는 원이었다. 따라서 공간을 기하학적으로 이해하는 르네상스 시대에 신성한 교회의 내부 공간은 유심화된 형태를 통해 완전성을 드러내야 했다. 이는 하늘을 향해 치솟기만 하는 고딕의 첨탑 대신 과거 콘스타티노플 비잔틴 건축의 돔을 교회의 건축에 다시 도입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실로 탁트인 무한한 평원에서 하늘은 돔과 같이 완전한 반구로 나타난다.
그러나 슐츠는 비잔틴의 돔과 르네상스의 돔이 갖는 의미의 차이를 간과하지 않는다. 비잔틴의 돔은 하늘의 의미를 담아내며 아른거리면서 빛나는 모자이크를 통해 비물질화된 영적 공간을 열어주지만, 르네상스의 돔은 기하학적 관점에 근거한 형태적 완벽성을 구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하학은 신비적 계시의 영역이 아니라 인간 이성의 산물이며, 따라서 르네상스의 돔은 하늘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관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비잔틴 돔의 이중껍질 구조는 적확하게 규정된 볼륨에 의해, 그리고 아른거리며 물질감을 상실하는 벽체는 인간중심적 조형에 의해 대치되는 것이다.”
한편 장식적 사유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그리스로부터 유래한 기하학을 통해 공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표상하는 르네상스는 이제 건물에 신성한 미를 부여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대 그리스의 주범을 도입한다. 그리스의 주범은 그리스 신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 신들은 인간보다 크게 우월하지 않은 지극히 인간적인 신이다. 따라서 이러한 신을 상징하는 그리스 주범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중세 기독교의 신성에 의해서는 거부되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접어들면서 이 주범들은 오히려 기하학적 비례미의 가치를 더욱 강화하는 것으로서 존중된다.
이러한 경향은 성전이 아닌 세속적 거주 장소에서는 더욱더 현저하게 드러난다. 피렌체의 피티 궁전Palazzo Pitti와 같이 르네상스 시대의 귀족 궁전과 중세의 궁전인 베키오 궁전Palazzo Vecchio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이 사실이 눈에 띈다.
우선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 서 있는 중세의 궁전 베키오를 보자..
베키오 궁전은 그 벽면이 다양하고 불규칙하게 다듬어져 있으며 이러한 벽면에 더구나 비례를 확인하기 곤란한 다양한 크기의 창문들이 배치되어 있다. 따라서 베키오 궁전은 다소 거칠고 변칙적인 분위기를 발한다.
반면 르네상스 궁전 피티는 이제 수학적 규율에 의해 질서를 회복한다. 그림에서 보듯 피티 궁전의 세 층은 완벽하게 규칙적인 커다란 반원형 아치들을 정연하고 연속적으로 배열함으로써 석재벽돌의 투박함을 중화시키며 기하학적 규율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
인간이 거주하는 공간을 기하학적으로 이해함으로써 부활하는 그리스적 비례미와 장식미는 르네상스의 또 다른 건축가 알베르티에서 고조된다. 이는 그가 르네상스의 도시 피렌체에 건축한 루첼라이 궁전Palazzo Rucellai의 벽면에서 표출되고 있다. 다음 그림은 이를 잘 나타난다.
궁전의 벽면은 정연하게 배열된 아치형 창문뿐만 아니라, 매끄럽게 다듬어져 그리스 주범이 중첩되는 방식으로 처리되고 있다.
이로써 그는 르네상스 건물의 정면에 질서와 인간적 신의 의미를 부여하여 도시의 외피를 새롭게 탄생시켰다.
귀향의 풍경: 빌라란테
르네상스가 무르익어 갈 즈음 르네상스의 천재들의 뒤를 잇는 후예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들은 예술사에서 매너리즘이란 그다지 명예스럽지 못한 이름을 얻는다. 하지만 이 매너리즘은 르네상싀 천재들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리고 그 도전은 르네상스가 추구하던 풍경과는 다른 풍경을 출현시킨다.
로마네스크 시대 이래로 인간은 초월적 차원에 정향되어 있었다. 이는 로마네스크 시대에 지상의 부정이란 상황으로 전개되었고, 이때 거주는 풍경과의 단절이란 방식을 취했다. 그리고 때에 따라 접근이 어려운 고립된 풍경을 애호하는 경우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후 고딕 시대는 벽체의 투명화를 시도하고 성당의 내부공간을 지상이 승화되는 영역으로 지어냄으로써 풍경과의 상호작용 측면에서 로마네스크에서보다 더 개방적이 되었다.
뒤를 잇는 르네상스 시대는 로마네스크나 고딕 시대와 달리 자연의 내재적 질서에 정향하기 시작했지만, 이 질서는 기하학적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이 기하학적 질서는 인간의 자연스런 실존 차원에서 경험되는 풍경에서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는 것이었다.즉 인간이 자연스럽게 살아갈 때 풍경 속에서 만나게 되는 어떤 형태도 기하학적 정의를 정확히 만족시키지 못한다. 예컨대 자연풍경 속에 존재하는 둥그런 돌은 원이 아니며, 자연풍경 안에서 우뚝 솟은 산도 기하학적 삼각형은 아니다. 때문에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이상적 거주지는 자연적 풍경이 아니라 기하학적 구조를 구현한 이상적 도시라는 관념이 발전한다. 결국 인간은 수세기 동안 그 실존의 기반을 종교에서 기하학으로 전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하여 중세적 전통과 르네상스적 새로움은 여러 방면에서 충돌하였지만, 인간이 거주하는 도시는 신성이나 이상적 이미지가 표현되는 공간이었으며, 반면 풍경과의 관계는 단절되고 약화되었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이렇게 지속되던 풍경과 거주의 관계는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요컨대 매너리즘의 특성이라 일컬을 수 있는 이 변화의 탁월한 예를 슐츠는 이탈리아 비트로보Vitrobo에 위치한 빌라 란테Villa Lante에서 발견한다.
이 지역은 로마에서 피렌체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한 시간 가량 달리다보면 오른 쪽 편으로 특이한 마을들이 나타난다. 로마로부터 서북 방향인 이곳에서는 움브리아에서 투스카니로 이어지는 평야의 모습이 지루한 듯 가끔씩 악센트를 가하는 이색적 풍경이 돌출한다. 그것은 밋밋하게 펼쳐지던 평야에 불현듯 떠오르는 잿빛 석회함으로 이루어진 언덕이다.
더욱이 그 언덕의 정상에는 수직으로 솟아오르는 석회암 절벽과 위태롭게 교차를 이루는 마을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이 마을들은 마치 그 석회암에서 우러나온 대지의 힘이 어느 순간 건축물로 변신한 듯 마술적 분위기마저 불러일으킨다. 과거 이 지역은 로마제국이전 에트루리아 인들이 거주하던 지역이다.비토르치아노(Vitorchiano)와 오르비에또(Orvieto)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마을이다.
에트루리아의 풍경은 알 수 없는 대지의 힘과 안락함을 보장하는 내부성을 드러내는 풍경으로 인간을 초대한다.
이 점에서 에트루리아의 풍경은 낭만적 풍경에 근사한 토속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실로 에투루리아인들의 거주지는 대지와 친근함으로 두드러진다. 이 지역은강한 대지성이 돋보이는 풍경이다.
슐츠의 풍경의 성격분류에 따르면 낭만적 풍경의 성격을 짙게 드러내는곳이다.
따라서 매너리즘 건축이 기하학적 공간에만 매몰되지 않으며 풍경과의 관계를 어느 정도 회복하는 거주이념을 실현해가는 와중에 가장 아름다운 별장을 바로 이곳에 지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별장은 몬테 끼미노Monte Cimino 경사지가 비트로보 주변의 경작지와 만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별장이 매너리즘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찬양되는 이유는 빌라 란테의 축을 이루며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물의 흐름 때문이다. 그 흐름은 별장의 꼭대기에 위치한 석굴 내의 샘에서 출발하여, 그 아래 분수에 일단 머물렀다가 돌의 사슬로 형성된 골을 타고 흐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매우 기하학적으로 설계된 원형분수에 이르게 된다.
즉, 빌라 란테의 위쪽에는 대지의 강한 시원성을 상기시키는 원시적 형태의 석굴이 자리하고 있으며, 하부에는 기하학적 이상미를 보이는 정원과 분수가 자리하고 있다. 이 두 풍경이 각각의 이질적 성격을 상실하지 않는 긴장 속에서 물의 흐름을 통해 순조롭게 그 갈등을 해소하고 있다. 따라서 슐츠는 빌라 란테에서 “자연과 문화가 더 이상 분리되지 않고 서로 흘러들고 있다.”고 묘사한다.
여기서 명백해지듯 매너리즘의 건축에서는 풍경의 이질적 성격에 대한 감수성이 되살아나는 것이 목격된다. 즉 인간 거주지의 이상적 모습은 동질화된 공간 안에 측정 가능한 건물들의 엄격한 비례미에 의해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이한 풍경의 성격이 갈등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는 인식이다. 이는 르네상스 이래로 거주와 풍경을 지배하고 있는 기하학에 대해 부분적인 도전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슐츠의 지적처럼 이러한 부분적 도전이 가장 탁월하게 성공할 수 있는 지역은 당시 인간실존의 지배적 장소인 도시가 아니라 도시 근교의 별장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16세기는 풍경의 다양한 성격과 거주의 본질적 통찰에 르네상스보다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가는 시대라 할 수 있다. 비록 16세기는 예술사에서 이전 시대의 나태한 답습이라는 명예롭지 못한 이름, 즉 매너리즘이라 불리지만...
이왕 이태리의 풍경에 들어온 이상 이태리에서 좀더 머물러 보자. 다음회에서는 이태리 풍경의 영혼을 베니스, 시에나등의 광장을 중심으로 돌아볼 것이다. 그럼 다음 여행지에서 만나기로 하자.
9.황홀한 환희의 풍경: 프랑스의 고딕성당 들
2022.06.08. 오후 1:28 by 이종관
프랑스에는 엄숙하고 장엄한 그리고 금욕적인 로마네스크 성당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돌로 지어졌지만 섬세한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을 환희로 인도하는 성당도 곳곳에 있다. 고딕 성당들이다.
초기 로마네스크 성당을 중심으로 한 중세 풍경은 중세가 중기를 넘어서면서 변화를 맞는다. 그 이유는 다시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철학이 토마스 아퀴나스 철학으로 달라지는데 있다. 아퀴나스는 로마네스크 시대를 연 아우구스티누스와는 달리 우리의 몸이 살고 있는 지상을 악이 소용돌이치며 결국 멸망될 영역으로 보지 않고 천국으로 가는 한 단계의 영역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는 아름다움을 지상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또 우리의 신체가 느끼는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의 일종으로 인정하였다. 그는 아름다움은 보아서 즐거운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아퀴나스의 철학은 성당 건축에 결정적 변화를 일으킨다. 이제 성당은 지상의 악을 격퇴하는 요새가 아니라 지상과 이어지면서 구원으로 승화될 수 있는 환희의 장소이어야 한다. 따라서 아퀴나스이후의 성당은 우리가 보아도 그저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우아한 장식성을 갖게 된다. 그리고 성당은 신성한 영역으로 상승하는 장소이여야 하기 때문에 하늘을 향해 사라지는 높은 첨탑을 갖게 된다. 이러한 성당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지어지기 시작했는데 프랑스에서 이 성당들을 보면 우리는 이미 그 벽체가 과시하는 섬세한 장식미로 황홀경에 빠진다. 그리고 이러한 성당들은 대개 예수를 잉태함으로써 천상과 지상을 화해시킨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되어 노트르담(Notre Dame: 우리들의 고귀한 부인) 성당이라 불린다.
로마네스크가 지상과의 단절을 추구함으로써 고립된 풍경을 발견하며 몽생미셸에서 절정을 보이던 것과 달리, 고딕건축 시대에는 풍경과 거주가 그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에 들어선다.특히 슐츠에 따르면, 이는 도시가 발전단계에 진입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11세기 이후 급속한 인구의 증가는 유럽의 도시화를 촉진했다. 이제 중세의 거주는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특히 중세도시는 밀도 높은 집중의 형식으로 특징지어진다. 따라서 도시의 경계를 형성하는 성벽, 도시의 중심을 형성하는 교회 그리고 조밀하게 집중된 친밀감 등의 성격을 보인다.중세도시의 풍경을 결정하는 건물은 도시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교회이다.
고딕교회는 하늘에 닿으려는 듯 치솟은 첨탑의 수직성과 함께 도시로 성장한 중세거주지를 중심화된 공간으로 형성하여, 풍경의 기본구조를 거주지의 차원에서 회복한다. 다른 한편 고딕성당은 초기기독교부터 시작된 공간의 영성화(Spiritualization)를 더욱 구체화한다.
초기 기독교가 콘스탄티노플의 풍경과의 관계 속에서 돔을 통하여 공간의 영성화를 구현했다면, 고딕은 이제 빛을 통하여 공간의 영적화를 시도한다. 특히 고딕성당은 하늘의 빛을 통하여 지상의 물체를 비물질화하면서 성당의 내부공간을 환희의 황홀경으로 승화시키는 탁월한 차원에 도달한다. 하늘에서 내리 비치는 광휘는 현대인들에게는 입자 혹은 파동에 불과하다. 그러나 신플라톤주의자 플로티누스의 빛의 형이상학에서 영감을 받는 중세인들에게 빛은 lux로서 그 자체 비물질적인 신성함이다.
빛은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처럼 오직 금빛 광휘로만 신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빛깔로 흩어지며 영롱하게 빛나면서 사물과 만나 사물의 다양한 모습을 드러낸다. 지상의 사물은 이제 로마네스크에서처럼 부정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신성한 빛의 은총으로 거룩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잉태하게 된다. 이렇게 신성한 빛을 통해 공간을 영적으로 승화시키는 고딕건축은 1140년 수도원장 쉬제르Suger(1081~1151)가 생드니 성당Saint Denis Basilica에서 두부chevet를 지으며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경이로운 빛lux mirabilis’을 성당 내부로 모아 오려할 때 절정에 이른다.
이제 성당의 내부는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하며 영롱하고도 경이롭게 일렁이는 신성한 빛, lux을 더 많이 받아들이기 위해 보다 넓은 유리 창문을 허용해야 했다. 그리고 이는 벽체의 두께를 얇게 만드는 구조상의 변화로 이어진다. 신비한 색을 발하는 스테인드글라스로 채워진 커다란 유리창이 설치된 성당의 벽체는 이제 로마네스크 성당의 벽체가 갖는 육중한 물체성이 희박화된다.
그러나 벽체의 물체성을 희박화하는 것은 지붕의 하중을 지탱하는 데 어려움을 야기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하중을 분산시키기 위한 구조가 모색되었고, 그 성공적 결과가 바로 리브볼트rib vault와 첨두형 아치였다.
벽체의 희박화와 리브볼트의 첨두형 아치는 많은 건축사가나 예술사가들에 의해 고딕의 고유한 특성으로 파악되었다. 그리고 그 둘 중 어느 것이 고딕을 탄생시킨 본질적 특성인가에 관한 논란이 있다. 그러나 슐츠는 이 둘은 각기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한 전체골격의 두 양상이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앞서 서술된 바와 같이 벽체의 희박화는 리브볼트란 구조의 발견을 촉발하며, 리브볼트 없이는 벽체의 희박화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고딕의 골격이 단순히 기술적․구조적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슐츠가 강조하듯 고딕 골격의 의미는 신성한 하늘의 빛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하여 교회 내부공간을 채우고 그 내부공간이 황홀경으로 출현할 때, 인간은 천상으로 인도되는 환희(Delight)를 체험 하게 된다는 데 있다. 즉 고딕성당 골격의 두 가지 양상은 빛의 형이상학적 의미로부터 탄생하는 사물의 구조인 것이다. 만일 빛의 존재가 현대 과학에서처럼 파동이나 입자로 이해되었다면, 고딕의 골격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신성한 빛, lux로부터 탄생하는 구조가 발전함에 따라 채광을 목적으로 건물 상단부에 설치되는 창문인 고측창clerestory이 점차적으로 커진다. 이는 동시에 고딕 건물에서 회랑gallery이 존재의미를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리하여 결국 교회 입구의 아치와 지붕과의 사이에 빛으로 충만한 지대를 열기 위해 트리포리움triforium을 아케이드arcade 상부에서 고측창과 결합시키는 스타일이 탄생한다.
이 과정은 파리남서 쪽 90km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최초의 고딕 성당인 샤르트르 성당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파리 중심에서 10km 거리에 있는 생드니 성당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이렇게 시각적으로 상징화된 비물질화는 단절과 차단의 의미로 그 견고성을 과시하는 로마네스크 성당 요새같은 벽체를 점진적으로 해체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결국 고딕성당은 외부와 단절로 폐쇄적이었던 로마네스크 성당과는 달리 외부의 풍경과 서로 호흡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그 고딕의 시대도 십자군 원정의 실패로 저물어 간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의 여명이 비치기 시작한다. 르네상스, 이제 우리의 고귀한 여행은 르네상스의 이탈리아로 향한다.
필자: 이종관
성균관대 철학과 교수. 성균관대 하이브리드 미래문화연구소 소장. 미래인문학 주임교수. 첨단과학기술과 관련된 도시, 경제, 문화 예술 문제를 젊은 연구원들과 함께 미래인문학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주요저서: 포스트휴먼이 온다. 공간의 현상학, 건축, 그리고 풍경. 사이버문화와 예술의 유혹. 디지털 철학 등
8.절대적 고립의 풍경: 몽생 미셸과 로마네스크 성당
2022.06.06. 오후 12:50 by 이종관
몽생 미셸.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40년전 라스트 콘서트라는 영화가 있었다. 유럽 영화였지만 순정 만화같이 슬프고 깨끗한 스토리에 쇼팽과 라흐마니노프를 연상시키는 피아노 선율의 OST로 많은 사람들은 감수성을 자극했던 영화이다.
이 영화의 스토리가 주로 전개되는 배경이 바로 몽생 미셸이다. 지상이지만 지상이 아닌 곳에 존재하는 듯 한 피안의 건물. 성스럽기도 하고 전투적인기도 한 그 위용 때문에 접근이 완전히 차단된 듯한 풍경. 그래서 더더욱 기괴하기도 하고 공포스럽기도 한 몽생 미쉘.
이 미스테릭한 지대와 건물을 제대로 여행하기 위해서는 로마네스크라는 시대를 알아야 한다.
로마네스크 시대는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유럽 전역에 전파되어 기독교적인 초월신과 인간이 그 신의 초월성에도 불구하고 가장 가까운 관계를 맺는 시대이며 유럽대륙에서 신과 죽을 운명의 인간하늘과 땅의 관계도 이러한 인간과 신의 관계에 따라 열려지는 시대이다. 따라서 로마네스크 시대의 풍경은 전체적으로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신의 현시, 즉 성인들의 출현이라는 방식으로 체험되는 신비적 성격의 풍경들로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리고 이 풍경들을 이어주는 길의 연결망에 의해 삶의 터로 형성된다. 즉 이러한 풍경들은 성지로서 신성시되며, 이 성지를 연결시키는 길은 사실상 지상에서 천국을 향한 순례자였던 당시의 인간들의 삶에 구원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 순례길이 다다르는 마지막 지점은 성 야곱의 성물이 보관된 스페인의 산티아고 드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였다. 중세 로마네스크 시대 유럽의 풍경은 바로 이 순례의 여정에서 신성한 의미를 지니고 다가오는 풍경과 그곳에 세워진 교회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열려져 서로를 연결시키는 길에 의해 삶의 터가 된다.
다른 한편 로마네스크 시대의 인간의 거주는 그 이전 시대와는 달리 신성한 풍경이외의 풍경과는 관계가 상대적으로 약화된다. 오히려 이 시대의 거주는 성당 건축물로 집결되는 이는 지상의 삶에 대해 적대적 양상을 보인다. 거기에는 로마네스크 시대는 돌아온 탕자로 유명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부철학이 바탕이 되어 시작되었다는 데 이유가 있다. 이 아우구스티누의 교부철학은 플라톤의 관념주의적 형이상학을 흡수함에 따라 지상을 죄악시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부철학은 그의 신국론에서 절정을 이룬다. 여기서 지상은 악과 증오의 영역으로, 신의 나라는 사랑과 구원의 영역으로 엄격히 구분되고 있다. 그리하여 신의 나라에 대한 열망은 오직 지상을 부정함으로써만 성취될 수 있다는 신념이 확고해진다. 따라서 중세인간들이 사는 실존적 삶의 중심인 성당은 그것이 자리 잡는 곳이 어디든지 일단은 지상을 거부하는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로마네스크 초기의 형태는 완벽하게 구분되는 교회의 내부 외부 공간 그리고 초월적 신을 향한 뚜렷한 수직성의 조합으로 나타난다. 이는 로마네스크 성당을 지상의 어떤 것도 침입할 수 없는 엄청난 중량감의 벽과 하늘을 향한 강한 의지의 표출인 탑을 기본 구조로 하는 건축물로 탄생시킨다. 그리하여 성당건물은 마치 외부의 적을 물리치기 위한 요새처럼 나타나는 전투적 분위기에 휩싸인다. 그러나 이는 성당의 내부공간이 안정성으로 충만되는 효과를 낳는다. 따라서 로마네스크의 건축들은 역설적으로 거주를 안정적 장소로 확립하는 중세문명의 기반이 된다.
몽생미셸Mont Saint Michel 수도원은 로마네스크 시대의 풍경과 거주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몽생미셸은 만조에 이르면 지상이 접근할 수 없는 완전히 고립된 풍경을 형성한다. 내부와 외부는 그리하여 완전히 격리된 경계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수도원의 외용은 여하한의 침입도 격퇴할 수 있는 철옹성처럼 압도적인 견고함과 육중함을 과시한다.
로마네스크 성당의 내부
몽생미셸 성당은 로마네스크에서 그 다음 시기인 고딕에 이르기까지 장기간 지어졌다. 그래서인지 몽생미셸 성당의 내부는 로마네스크적이 아니라 고딕적이다.
전반적으로 진정한 로마네스크 성당의 내부는 로마네스크 성당이 동경하는 초월의 풍경을 장식의 제거와 비움을 통해 충만하게 담고 있다. 외부로부터 엄중하게 차단된 내부는 그 자체 신의 완전한 임재라는 의미로 가득 채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다. 로마네스크는 바로 이 가능성을 실현하는 독특한 내부공간의 구성방식으로 돋보인다. 작위적 장식을 멀리한 채 육중한 벽으로 차단된 폐쇄성은 채광의 어려움으로 귀착된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로마네스크의 내부공간을 초월적 위대함이 내려앉은 근엄하고 장엄한 분위기로 충만케 한다. 실로 성당의 내부공간으로 들어가면 외부공간에서 만나는 사물의 다양성이 거의 소거된 채 갑자기 텅 빈 듯하다. 그러나 이는 공간을 급격히 엄습해오는 무無가 지배하는 공간으로 전환시키고 여기서 일종의 광활함이 공포감과 함께 압도적으로 밀려온다. 여기에 장식이 배제된 잿빛 석재가 발산하는 육중함이 더해지면 로마네스크 성당의 내부공간은 칸트가 정의한 역학적 숭고의 엄숙한 감동까지 선사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로마네스크 성당의 내부공간이 그저 텅 빈 공간은 아니다. 로마네스크 성당의 내부공간이 갖는 절묘함은 비워진 공간을 매우 절제된 방식으로 구성함으로써 엄숙하고 근엄한 신성의 임재를 고조시키며 그 공간을 숭고의 장소로 승화시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러한 로마네스크 성당의 내부공간의 신성성은 그 안에서 외부공간과 단절된 인간의 행위를 내부공간에서 적극화하는 효과를 발생시켜야 했다.
슐츠는 바로 이 점을 주시한다. 그에 따르면 로마네스크 건축의 근본적인 특성은 초기 기독교 성당에 나타나는 원래의 내부성을 인간적 크기와 움직임에 밀접하게 관련시키기 위해 공간을 율동적으로 세분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탑의 도입, 그리고 지나치게 좁고 긴 나이브의 도입은 바로 이러한 효과를 증진시키는 요소들이다.
물론 로마네스크 성당 내부공간에서 보이는 이러한 특성은 로마네스크 성당의 근본적 성격인 육중함과 단절이 유발하는 행위의 정지와 상충되는 듯하다. 하지만 내부공간에서 제공되는 보호와 신성한 영감 등은 악과 결별한 인간의 행위를 승화된 방식으로 적극화시키는 결과를 함축한다. 때문에 로마네스크 성당은 그 내부를 바로 이렇게 승화된 행위가 진행될 수 있게 구성함으로써 오히려 육중함과 단절에 내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효과적으로 실현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공간구성 방식으로 로마네스크 성당은 요새일 뿐만 아니라 하늘에 이르는 문이라는 의미를 구현하게 된다.
결국 로마네스크 건축을 살펴보면 내부와 외부의 관계는 폐쇄적 은신처에서 상징적이나마 개방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하여 로마네스크 건축은 또한 고체성과 비물질성이라는 상충적 성격을 동시에 표현하게 된다.
로마네스크 성당의 근본적인 특성은 외부와 단절된 절대적 내부성과 그곳에 임재하는 신의 초월성이다. 초기의 교부철학에 따르면 인간의 내부성은 자연적 삶이나 세속적 사회생활로는 접근이 불가능한 영적 영역이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에서 밝혔듯이 사랑에 중심을 둔 인간행위의 원리는 오직 계시로서만 알려진다. 로마네스크 성당은 바로 이것을 가시화하고 구체화는 건축물이다.
7.지상을 넘어 선 풍경: 콘스탄티노플과 하기아 소피아 성당
2022.06.06. 오후 12:09 by 이종관
터키, 찬란한 과거를 자랑하는 나라.
중동을 제패하고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하던 제국, 오스만 터키. 1683년 여름 오스트리아 빈 숲에서 오이겐이 이끄는 유럽연합군이 오스만 터키의 침공을 패퇴시키지 못했다면, 유럽은 아마 오랫동안 오스만의 지배하에 이식된 아랍문화를 지금보다 훨씬 두터운 역사의 나이테로 갖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런 터키 역사의 중심,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도시, 바로 이스탄불이다.
그러나 이스탄불은 1450년 이후에야 이스탄불이라고 불린다. 이 도시의 원래 이름은 메가라였단다. 하지만 그리스에 정복된 후에는 비잔티움이란 이름을 받게 된다. 그러다 로마 제국 시절 기원후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제국의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콘스탄티노플이라 불린다. 로마는 이 새로운 수도를 신에게 봉헌함으로써 신의 질서 아래 옛 질서를 흡수하면서 신의 나라를 세우려 하였다. 따라서 콘스탄티노플이 새로운 수도로 선택되었을 때, 우선 콘스탄티노플은 로마를 흡수할 수 있는 위치여야 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의 성지, 즉 예루살렘을 대신할 수 있는 곳이어야만 했다.
실제로 콘스탄티노플은 아시아와 유럽이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또한 여기서 남북의 흑해와 지중해가 만난다.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는 로마제국의 거대한 직교축인 카르도Cardo와 데퀴마누스Decumanus의 교차점을 형성한다. 그리고 새로운 수도는 새로운 질서, 즉 기독교의 질서에 따라 신의 나라를 세우려는 의도로 선택된 곳이므로, 그 풍경은 신의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신성함으로 돋보여야 했다.
콘스탄티노플은 바로 이러한 풍경의 성격을 부족함 없이 드러낸다. 그곳은 유럽에서는 바다를 거쳐서 도달할 수 있는 곳이다. 즉, 마르마라Marmara해에서 콘스탄티노플에 접근하면 콘스탄티노플은 마치 바다 위의 신기루처럼 혹은 실재하지 않는 하늘의 도시처럼 수면 위에 떠있는 환상적 모습을 드러낸다.
그곳은 실재를 넘어서는 초월성을 드러내는 풍경으로 나타나 마치 다가갈 수 없는 신성의 영역인 듯 빛난다. 콘스탄티노플은 물론 땅과 하늘이 만나 풍경을 이루는 곳이지만, 하늘의 이미지가 더 두드러져 지상에서 신의 나라로 다가오는 것이다.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의 건물들은 로마의 건축을 모델로 하고 있음에도, 콘스탄티노플의 배경을 이루는 풍경을 흡수하며 변모하게 된다. 그 대표적 형태가 바로 돔이다. 콘스탄티노플이 위치한 지역처럼 태양이 균일한 곳에서, 또 광활하게 트여진 풍경에서, 하늘은 가장 완전한 자신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때 하늘은 땅을 감싸 안는 반구가 되어 돔의 형태로 나타난다.
인간이 돔을 지을 때 인간은 바로 이 도달할 수 없는 하늘을 지상에 지음으로써 신의 나라에서 구원을 받아야 할 자신의 실존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콘스탄티노플의 스카이라인은 슐츠가 지적하듯 550년경부터 시작된 도시개발 이후 곳곳에 솟아올라 지상의 건물을 감싸고 있는 돔에 의해 매우 독특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리하여 콘스탄티노플은 실루엣의 도시로 새롭게 생기生起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돔의 내면은 더 이상 빛날 수 없는 금빛 광휘로 채색되었다. 성당에 중심에서 솟아오른 돔은 곧 태양빛으로 가득 찬 하늘이기 때문이다. 반면 돔을 지탱하는 아랫부분은 세속적 영역, 즉 지상이다. 따라서 돔으로 중심화되어 있으며 그 돔을 지탱하는 역할을 하는 비잔틴 성당의 내부공간은 형태적으로 유심공간centralized space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성당 건축의 골격에서 돔이 높이 위치하면 할수록 그것은 성스러워지며, 신성한 빛은 천상의 돔에서 발하여 유심공간으로 퍼져나간다.
콘스탄티노플의 풍경 속에서 탄생한 돔이 갖는 이러한 의미를 슐츠는 한 궁정시인의 시에서 발견한다. 이 시는 콘스탄티노플의 스카이라인을 가장 뚜렷하게 결정하는 하기아소피아 성당의 헌당식에서 읊어졌다.
“최초의 아름다운 빛이 아치와 아치를 넘어들면서 어두운 그림자를 몰아낼 때, 왕자들과 백성 모두는 한 목소리가 되어 찬송가를 불렀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아치들이 하늘에 놓인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 위에서 돔은 한없이 광활하고 조금도 변화가 없는 하늘로 솟아오른다. 그리하여 돔은 빛나는 하늘처럼 굽이지며 교회를 품는다. 금빛 흐름이 되어 쏟아져 내리는 빛이 사람들의 눈을 때릴 때 그들은 쳐다볼 수 없었다…. 이제 거대한 교회공간으로 광휘가 스며들어 근심의 구름을 거두어내고 마음을 맹세로 가득 채우며 살아있는 신을 향한 길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신성한 장소에 들어온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그곳에 살게 되며 그들의 눈에는 환희의 눈물이 고일 것이다.”
시인의 시적 언어에서 드러나듯 금빛 광휘로 빛나는 돔은 하늘을 향해 떠오르는 구원의 황홀경으로 인간들을 인도한다. 그리하여 콘스탄티노플에서 시작된 초기 기독교 비잔틴 건축은 콘스탄티노플의 풍경을 영적인 공간으로 작품화하는 데 이른다. 그리고 이는 다시 베네치아의 성마르코 성당에서 상부는 빛을 모아들이고 하부는 빛을 약화시킴으로써 시선이 하늘을 향해 올라갈수록 구원의 환희가 절정에 가까워지는 공간의 영적 승화로 완성된다. 슐츠가 말하듯, 결국 초기 기독교에서 돔과 유심공간을 통해 성취되는 공간의 영적 승화는 그리스와 로마의 유산을 부인함으로써 시작되지만 그것은 배격된다기보다는 변형된다.
슐츠에 따르면 기둥과 같은 인간중심적 요소들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것은 물체덩어리로서 중량과 조형력을 상실한다. 이것은 표면의 처리와 빛의 사용이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표면이 모자이크로 처리된 성당의 내부의 벽들은 그 내면을 결코 투과할 수 없는 어둠 속에 묻어버린 물체와는 달리 물체성을 잃어가듯 아른거리며 출현한다.
이는 인간들에게 물질성이 부재하는 환상처럼 지상에는 없는 영적 세계를 열어준다. 특히 상부의 개방적 채광과 하부의 어둠의 대비는 돔으로 구현되는 하늘의 신성성을 더욱 고조시킨다. 빛과 모자이크를 통해 벽체의 물질성을 희박하게 만드는 비물질화는 물체덩어리가 의미하는 대지의 감금을 무력화하며 영적 세계로 인간을 불러들이는 것이었다.
모자이크가 불러일으키는 비물질화의 영적 공간성은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 풍경에 영향을 받은 이태리 아드리아해의 도시 라벤나에서 절정을 이룬다. 산비탈레 성당의 내부공간이 그것이다.
이제 콘스탄티노플의 여행을 마치고 다음회에는 프랑스로 떠나자.
6.신들의 풍경, 그리스: 델피, 아크로폴리스, 산토리니
2022.06.05. 오후 11:02 by 이종관
그리스, 신들의 땅. 제우스, 헤라, 아프로디테, 아레스, 디오니소스, 아폴론 와 같은 신들이 때로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으로 사랑하고 질투하고 싸우는 곳, 그러면서도 죽음을 떨쳐 버릴 수 없는 비극적 인간의 삶에 신탁을 내리던 곳. 대체 그곳은 어떤 곳 이 길래 그 땅의 신들은 신적이라기 보다는 인간적인가?
그리스 풍경을 돌아보면, 이집트와 달리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방문객을 맞이한다는 사실이 체험된다. 비옥하고 평화로운 평원이 있는가 하면, 주로 관목으로 형성된 숲은 숲이란 말이 어색할 정도로 희박하고 메말라 있다. 이 메마른 산에서는 석회암의 석질이 더욱 강조되어 지배적인 위용마저 드러낸다. 그리고 그곳에는 간헐적으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계곡과 극적인 벼랑도 출현한다. 그리스의 풍경은 이렇게 풍부한 다양성을 특징으로 한다. 더구나 비옥한 평원, 지배적인 산 등은 다양한 자연적 힘들을 체현하고 있는 것 같다. 이집트의 풍경이 광활하지만 단조로운 우주적 풍경의 성격을 갖는다면, 그리스의 풍경은 각각 뚜렷한 개체성을 지니고 비교적 선명하게 구별되는 공간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그리스 풍경은 고전적 풍경의 전형을 이룬다.
스컬리V. Scully는 그리스의 풍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다양한 풍경들이 비교적 명료하게 서로 질서를 이루고 있고, 그 규모가 적절하기 때문에 인간은 그리스에서 삼켜지지도 표류하지도 않는다. 그리스에서 인간은 땅에 가깝게 다가가 그로부터 위안과 위협을 경험할 수 있다.” 여기에 강렬한 햇빛과 투명한 공기로 사물의 형태는 더없이 뚜렷하게 현전한다. 이러한 성질들은 그리스인들에게 신들로 의인화되어 다가왔으며, 두드러지는 개별적 성격을 갖고 있는 장소는 어떤 특정한 신의 현시로 경험되었다.
스컬리가 강조하듯 그리스인들은 풍경을 특정한 신성의 표현으로 읽어낼 수 있는 눈을 숙련시켰다. 이는 땅에 대해 단순한 형태가 아니라 세계를 지배하는 힘을 실질적으로 체화하고 있는 진정한 힘으로 받아들이는 종교적 전통 때문이다.
예컨대 자연이 지배적인 풍경은 대지와 농업의 여신인 데메테르와 헤라에게, 그러나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풍경은 신들 중의 신인 제우스에게 헌정되었다. 또한 인간들이 서로 모여 공동체, 즉 폴리스를 이룰 수 있는 풍경은 아테나에게, 대지의 힘과는 반대로 인간들이 지성을 발휘해야 하는 풍경은 아폴로에게 헌정되었다. 이러한 신들은 인간적인 어휘로 포착되어 인간의 성격들을 상징화하기도 한다. 따라서 인간과 자연은 그리스 신들을 통해 매개되며 따라서 신들은 인간과 자연이 만나는 터를 연다. 그리스의 신전들은 바로 이러한 사태가 구체화되어 제공되는 건축학적 장소들이다.
즉, 신성한 풍경은 어떤 자연의 힘이 신으로 체화된 것이기 때문에 신전과 부속건물이 그 풍경의 의미를 고양시킬 수 있는 장소에 위치하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 신전이 그 형태에서 약간씩 변화를 보이는 것은 그것이 지어지는 특정한 입지의 성격과 거기서 상상되는 신의 성격을 의인화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다. 그리스 신전이 지세 혹은 토질과 같은 풍경의 핵심요소로부터 파악되지 않고는 이해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리스의 건축이 이집트처럼 동일한 법칙이나 전형에 의해 지배되지 않고, 풍경의 성격에 따라 다양한 조직 방식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레틀락Gregory J. Retallack이라는 고고학자는 그리스 신전이 들어선 곳의 지질, 지형, 식물 등과 호머, 헤로도토스, 플라톤 등이 남긴 역사적 기술을 토대로 신전의 입지를 연구하였다. 그 결과 신과 신전이 지어진 장소 사이의 분명한 상관관계를 밝혀냈다. 예를 들어 농업의 여신 데메테르와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신전은 모두 ‘제롤Xerolls’이라는 지중해성 토양 위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토양은 곡물 경작에 이상적인 비옥한 땅이다. 또한 태양신 아폴로와 그의 누의이자 달과 사냥의 여신인 아르테미스의 신전은 유목민의 목축만이 가능한 미풍화토양Orthent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이밖에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나 바다의 신 포세이돈 등 해양과 관련이 있는 신들의 신전은 해안가 토양인 ‘캘시드Calcid’ 위에 지어졌다.
이 연구를 수행한 레탈락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예식은 종교뿐 아니라 생활에도 기반하고 있으며,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 좋아할 만한 장소를 골라 신전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물론 이러한 고고학적 연구는 신전이 위치한 장소의 토질과 신의 성격 사이의 상응관계를 실증적으로 입증해준다. 그러나 이때 토질은 단순히 물리적인 성질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흙, 나아가 대지라는 사방의 요소로 이해되어야 하며, 따라서 그 관계는 오히려 풍경과 거주의 본질적 관계 아래서 조명되어야 한다. 레틀락은 논문의 결론에서 마치 토질과 신전의 상응관계가 그리스인들의 독특한 취향에서 형성된 것처럼 주장하는 일종의 민족 심리학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나 그 상응관계는 사실상 풍경과 거주 그리고 건축의 본질적 관계다. 따라서 신전은 그리스인들에게 거주지를 제공한 그리스의 풍경이 그 그리스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체현하고 있는 구조로 다가왔으며, 그들은 그 의미를 어떻게 건축적으로 드러내어 어떤 삶의 세계를 형성해왔는지를 밝혀주는 통로인 것이다.
모든 그리스의 신전들은 그리스의 신들이 사실상 가계를 이루고 있듯이, 가족적인 유사성을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취하고 있는 형태와 디테일은 그것이 자리하고 있는 풍경으로부터 드러나는 성격을 신성화한 조형적 구조물이다. 때문에 그리스 신전들은 미묘한 차이를 갖고 있다.
이러한 풍경과 거주의 관계가 가장 탁월하게 드러나는 장소는 고대 그리스 종교의 중심지인 델피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이다.
델피
델피의 풍경은 풍경의 중심을 결정하는 탁월한 사물들이 긴장된 대조를 보이며 숭고한 경험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풍경은 하늘을 찌르는 듯 솟은 파르나소스 산으로 중심화되어 펼쳐진다.
이 산은 풍경의 탁월한 중심을 형성하는 또 다른 사물인 계곡과 팽팽한 긴장을 이루고 있다. 그리스인들이 세계의 배꼽을 위치시킨 파르나소스 산과 그 바위들은 녹색의 치장을 물리치고 적나라하게 또 깎아지른 듯 하늘로 치솟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로는 평지가 아니라 플에스토스Pleistos 계곡이 추락을 유발하듯 위협적으로 깊게 파여 있다.
그러나 그렇게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위험스런 풍경 사이로 코린트만을 향해 이티아Itea 평야가 시원하게 펼쳐지며 탁 트인 바다와 연결되어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이렇게 이곳에서는 산, 바다, 평야, 계곡 등 풍경의 근본 사물들이 서로 대조를 이루며 경쟁하듯 풍경을 서로 중심화하고 있다.
따라서 이곳은 그리스인들에게 인간의 실존적 드라마를 가장 잘 드러내는 신성한 풍경으로서, 그리하여 세계의 중심으로 경배된다.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이유에서 세계의 배꼽을 의미하는 옴파로스Ompharos를 조형화하여 설치함으로써 풍경의 의미를 세계의 중심으로 각인시켰다.
동시에 이곳에 시와 지혜 그리고 균형의 신인 아폴론의 신전이 세워진다.
이를 통해 풍경의 극적 대조와 긴장은 지혜로운 균형을 성취하고, 그럼으로써 풍경의 신성은 더욱 고조되어 기려진다. 특히 델포이의 배경을 이루는 바위 절벽은 그리스의 찬란한 태양을 받으며 파에드리아데스, 즉 빛나는 바위라는 이름아래 이곳 풍경을 환히 밝힌다.
반면 플레부스 계곡은 마치 지하 세계 하데스의 음습한 기운을 흘려내듯 카스탈리안 샘으로 깊숙이 파여 있다.
그러나 파에드리아데스 절벽의 빛나는 분위기가 아폴론 신전에 머금어 질 때, 플레부스 계곡의 어둠과 공포는 아폴론의 찬란함으로 평온을 찾는다. 이렇게 플레부스 계곡을 휩싸고 있는 하데스의 두려움과 공포는 모든 것을 품고 있는 땅의 위대함으로 반전된다.
신화에 따르면 원래 이곳은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의 성소였으며, 특히 그의 딸인 퓌톤이라는 포악한 뱀이 바로 카스탈리안 샘 부근 큰 동굴에 살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지혜의 신 아폴론이 한 발의 화살을 명중시켜 퓌톤을 죽이고 이곳을 차지하였다. 이 신화를 건축현상학적으로 바라보면, 그 의미는 다음과 같이 인간 실존의 과정을 기록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즉, 그리스인은 이곳의 자연 풍경이 함축하고 있는 공포와 두려움의 성격을 이곳 풍경의 또 다른 성격을 명징하게 드러내는 아폴론 신전을 지음으로써 극복한 것이다.
아크로 폴리스
아테네는 역사의 어느 순간부터 신들의 땅에서도 중심이 되었다. 그것이 그렇게 중심이 된 연유가 있다. 아테나 지역에 들어서면 마치 그 지역 풍경을 모으는 초점처럼 당당하게 서있는 언덕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풍경을 모으는 중심은 인간에게 수학적 의미의 중심이 아니라 신성한 장소로서 다가온다. 그리고 이 신성한 장소는 죽을 운명의 인간의 삶이 출발하는 원점이면서, 동시에 귀환해야 할 목적이 된다. 모든 것이 집중되는 양태는 고립을 통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날 수도 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는 바로 대표적인 사례이다. 아티카라고 불리는 평원에서 아크로폴리스는 탁 트인 바다를 대면하고 주변 풍경을 모으며 가파르게 솟아 돋보인다. 아테네는 아크로폴리스를 통해서 터로서 성립하며, 그러한 한 아크로폴리스는 신성성을 지닌다. 때문에 아테네인들이 그곳에 정착하여 삶이 안정되었을 때, 아크로폴리스에 신전을 세운 것은 결코 우연히 아니다. 그리고 이 신전에 세워짐으로써 아크로폴리스에 숨겨져 있던 신성한 풍경의 의미가 선명하고 명료해진다.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난 지혜의 여신이며 전쟁의 여신이 아테나에 바쳐진 신전, 이 신전은 아테나 여신의 영원한 처녀성 때문에 파르테논이라 불린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1687년 9월 어느 날, 오스만 터키와 베니스군의 치열한 전쟁와중에 날아온 포탄으로 거의 반이 날아가 버리는 비운을 겪는다. 근대의 여명기에 인간은 고대 그리스가 전쟁과 지혜의 여신으로 숭배하던 이 아테나의 신전을 아이러니컬하게도 전쟁으로 파괴했다. 근대는 탈신화의 시대라는 것을 포탄으로 입증하려 했던 것일까? 그럼에도 남은 신전은 이 어처구니없는 역사의 사건을 폐허의 시적 언어로 품는다. 그러면서 아크로폴리스의 정상에서 그리스의 태양이 그것을 통해 비로소 정체를 알리듯 하얗게 빛나고 있다. 태양과 대리석이 만나면 그토록 경이로운 것인가. 어느 여름날 먼발치에 아크로폴리스를 바라보면 그 언덕은 우리의 시선을 꼭대기로 인도하고 거기서 빛나는 신전으로 경이를 선사한다.
그 언덕 위에 신전이 들어섬으로써 실로 감추어진 많은 것들이 드러난다. 언덕 위를 그저 스쳐 지나가기만 하던 바람은 신전이 세워짐으로써 그 신전과 맞부딪쳐 휘감아 돌며 비로소 그 정체를 뚜렷하게 드러내게 된다. 한낱 돌로 파묻혀 있던 대리석은 신전으로 일으켜 세워져 하늘의 빛과 만나며 스스로 빛나면서 동시에 태양의 찬란함을 일깨운다. 또 신전의 견고함은 나무와 바다의 덧없는 본성을 드러낸다. 신전의 대리석 벽돌은 여명의 빛을 포착하여 하늘의 본성을 드러낸다. 아울러 신전을 중심으로 삶과 죽음, 신성치 못한 것과 은총, 승리와 치욕, 인내와 타락 등 인간이 그의 운명의 형태를 얻게되는 여러 관계와 길들, 그러한 것들이 펼쳐지게 된다. 이와 같이 신전을 통해 그 신전이 없었으면 감추어졌을 것들이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다. 신전을 통해 인간과 인간이외의 존재자들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터가 밝혀지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신전은 가파른 골짜기 한가운데 서 있다. 신전은 신의 모습을 어렴풋이 에워싸고 있다. 신전은 기둥 틈새로 감추어지면서 열려 보이는 실내를 통하여 신의 모습을 신성한 영역으로 드러낸다. 이 성전을 통해 신이 성전에 내려앉는 것이다. 신이 그렇게 현현한다면 그 찬란한 빛 속에서 세계는 비추어 진다. 신전은 비로소 돌과 동물, 인간과 신이 그들 본연의 모습으로 있을 수 있게 하는 세계를 펼쳐 보인다. 신전은 세계를 일으켜 세운다. 그것은 세계를 열어 보이면서 땅을 떠올린다. 하지만 신전은 땅을 그 자체에 있어서 되감추어지는 것으로 떠오르게 한다. 성전은 바위에 서 있다. 그것은 폭풍을 견디어내며 그렇게 폭풍의 힘을 보여준다. ... 삶과 죽음, 신성치 못한 것과 은총, 승리와 치욕, 인내와 타락 등 인간이 그의 운명의 형태를 얻게되는 여러 관계와 길들, 그러한 것들이 신전을 중심으로 펼쳐지게 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 신전에 의해 비로소 주변의 자연환경, 그 신전에 건축에 사용된 대리석의 본질, 그리고 그 시대의 사람들이 그러한 것들과 어우러지면서 맺었던 관계가 드러나는 것이다.
사라진 아틀란티스의 풍경: 산토리니
사라진 낙원, 아틀란티스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는 섬. 산토리니. 산토리니의 자연적 풍경은 에게 해를 마주보는 단애에서 빛난다. 그것은 내려 떨어지는 투명한 빛을 머금고 그렇게 머금어진 빛은 단애의 흙과 돌의 분위기를 빛으로 담아내며 반사되어 다시 에게 해와 만난다. 이 때 바람은 에게 해의 표면을 스치며 물결을 일으키고 물결은 다시 흙과 바위의 분위기가 스며있는 그 빛을 만나 오묘한 색으로 찰랑인다.
이렇게 산토리니에서는 바다와 빛 그리고 돌의 사물적 의미, 즉 하늘과 땅이 만나 죽을 운명의 인간에게 신성한 의미를 들려주는 사물의 본질이 단애를 중심으로 뚜렷한 조형성을 지니고 나타난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이러한 조형성을 훼손하는 어떤 마을도 용납되지 않는다. 절벽을 이루는 갈색 화석암은 돌의 사물적 의미인 영속성과 초월성을 알려준다. 또 바다의 광활함은 단애와 짝을 이루며 자연적 풍경이 결코 단순하게 감각적․시각적 향유의 대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 이러한 자연적 풍경에서 거주하는 인간은 우선 자신들의 삶을 돌려주어야 할 신성한 자리로서 바다와 태양 그리고 돌이 서로를 아우르는 바로 그 장소에서 자신의 실존적 존재가 비로소 거주하며 집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곳에 형성된 마을은 특히 자연적 풍경을 드러내는 초점 역할을 하며 분위기를 독특하게 만든다.
실제로 산토리니의 대표적인 마을인 이아Oia와 피라Fira는 가파른 단애의 절벽을 따라 형성되어 있다.
이 마을은 절벽이 감추고 있는 풍경현상학적 의미가 바로 그 절벽으로부터 탄생한 작품인양 절벽을 배경으로 절벽에 안겨있다. 마을의 집들은 바다와 태양이 베푸는 찬란함과 뚜렷한 조형적 두드러짐을 감사히 받아들이듯 대체적으로 하얀색과 푸른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이렇게 풍경의 빛깔을 모아오는 벽과 지붕 때문에 태양은 자신이 갖는 의미를 바다와 마을에서 눈부시게 빛내며 마을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그리고 마을 곳곳에는 이곳으로 정착한 인간들이 풍경 속의 거주를 신성함으로 발견해냈음을 보여주는 사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산토리니 마을에 적절한 리듬으로 산재해있는 그리스정교의 성당들이다. 이 교회는 산토리니 마을의 풍경을 바로 그곳만의 풍경적 특성으로 구체화하는 상징물이다.
산토리니의 성당들은 고딕성당처럼 하늘만을 향한 무한한 동경을 담고 있지 않다. 산토리니의 성당은 그곳의 바다, 절벽, 태양, 그리고 인간의 거주가 이루어내는 풍경의 의미론적 요소들을 결코 훼손시키거나 초월하지 않는다. 성당은 과장 없이 풍경 안에 머물며, 풍경의 신성함으로 드러내는 데 머문다.
필자: 이종관
성균관대 철학과 교수. 성균관대 하이브리드 미래문화연구소 소장. 미래인문학 주임교수. 첨단과학기술과 관련된 도시, 경제, 문화 예술 문제를 미래인문학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주요저서: 포스트휴먼이 온다. 공간의 현상학, 건축, 그리고 풍경. 사이버문화와 예술의 유혹. 디지털 철학 등
5.첫번째 여행:이집트 풍경의 영혼
2022.06.05. 오후 10:20 by 이종관
슐츠의 풍경현상학을 가이드로 하여 이집트를 여행하면, 그 풍경의 영혼이 어떻게 나타날까?
우선 이집트의 하늘과 땅이 우리를 사로잡을 것이다. 모든 것을 탈진 시킬 것 같은 뜨거운 태양, 지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감히 접근할 수 없을 것 같은 무한한 사막. 이집트는 슐츠가 분류한 풍경의 성격에 따르면 우주적 풍경이 전형이다. 그곳에 엄청난 크기로 우뚝 서 있는 불가사의가 있다. 바로 피라미드이다.
이집트, 거대한 피라미드의 땅!
만일 피라미드가 없었다면 이집트는 우리에게 그토록 직접적으로 기억될 수 없을 것이다. 때문에 오래전부터 피라미드를 둘러싸고 신비로운 전설과 기괴한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신화와 전설을 추방한 과학의 시대인 오늘날, 피라미드를 소재로 또 다른 전설을 만들어내고 있다. 피라미드는 인간이 지은 것이 아니라고 비행접시를 타고 온 외계인이 지었다고. 물론 이러한 소문은 제법 지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사람에게는 호소력이 없었지만, 이 무모하게 거대한 돌덩어리가 이집트왕의 무덤이라는 사실 역시 의문과 당혹을 불러일으킨다. 대체 왜 이집트인들은 죽음에 이토록 절대적인 과잉투자를 했을까?
그 이집트의 풍경을 슐츠를 따라 풍경의 시학으로 사색하면서 거닐어 보자.
이집트는 어떤땅인가? 장구하게 흐르는 나일강과 무한히 펼쳐진 사막의땅이 이집트이다. 이러한 이집트의 풍경은 그단순성과 규칙성에 의해 성격을 드러낸다. 나일강은 좁고 길게 광활한 이집트의 대지를 관통하고 있다.
에티오피아의 아비시니아 고원과 적도 근처 부룬디의 한 샘에서 발원해 빅토리아호를 거쳐 흘러오는나일 강에는 봄과 여름에 비교적 규칙적으로 비가 내린다. 그래서 매년 9월이면 강이 범람하여 홍수가 일어난다. 그러나 나일 강의 홍수는 재난이 아니었다. 그 홍수는 오히려 비옥한 흙을 선사한다. 그리고 이 흙에 인간이 노동을 가하면 그들의 삶을 지속시켜줄 곡물이 풍요롭게 생산된다. 나일 강은 문자 그대로 이집트의 ‘젖줄’이었으며 이집트 문명이 고도문명으로 발전하는 물적 토대이다.
그런데 나일 강이 이러한 경제학적 기능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나일 강은 죽을 운명의 인간의 삶을 살려내는 물이 거룩하게 흐르는 신성한 중심지이다.
‘신성함’이 결여된 곳에서 인간의 거주하는 ‘터’는 열리지 않는다. 사실 ‘신성함’이 결여된 곳에서 하늘과 땅 그리고 죽을 운명의 인간들이 모이지 않는다. 죽을 운명의 인간들이 마냥 떠돌지 않고 정착하며 거주할 수 있는 ‘터’가 열리기 위해선 유한한 그들의 삶을 넘겨주어야 할 ‘신성함’이 그들 거주의 터에 깃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나일 강 계곡의 양측에는 인간의 활동 공간을 위압적으로 제한하는 사막이 펼쳐져 있다. 이렇게 인간의 활동을 위압적으로 제한하는 사막은 다시 인간의 편에서 보면 인간의 상상력과 생각을 초월해 있는 절대적 우주적 규모이다. 이집트의 기후는 늘 모든 것을 뜨겁게 달구는 태양빛으로 건조하기 이를 데 없으며, 날씨의 변화도 그다지 크지 않다. 또 나일강은 매년 비교적 규칙적으로 범람한다. 이러한 조건들은 이집트 풍경을 영원한 질서의 공간으로 드러낸다.
이집트의 풍경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우주적이다. 이러한 풍경을 초점으로 모으는 건축물들도 우주적 성격을 구현해야 할 것이다. 특히 이집트인들의 삶의 근거인 나일강은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
또 언제나 변함없이 작열하는 이집트의 태양은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진다. 따라서 이집트의 우주적 풍경에는 이미 남북축과 동서축이 교차하는 직교체계가 함축되어 있다. 이렇게 이집트 풍경으로부터 드러나는 영원한 질서는, 그 풍경에 인간이 정착할 때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삶의 또 다른 연장이라는 이해의 길을 열어주지 않을까. 따라서 이집트에서는 삶은 죽음이 후에도 계속되는 것이며, 거주의 핵심은 ‘영원한 집’을 짓는 작업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분묘와 장제신전들은 삶이 끝나 소멸한 자들의 무덤이 아니다. 그것은 영원한 질서를 구현하는 사물로 지어짐과 동시에, 이러한 건축 작업이 이집트 문화의 중추를 형성하게 된다. 그 형태적 사례는 신전의 공간적 구조가 마치 프랙탈fractal과 같이 작은 크기로 일정하게 반복되는 규칙으로 나타나는 경우이다.
특히 이집트의 분묘는 죽은 자의 무덤이라기보다는 이집트의 풍경에서 실존하는 인간에게 풍경의 의미가 삶의 의미로 응결되어 지어진 가장 진정한 의미의 집이다. 그리고 풍경의 영원성은 거대하고 육중한 돌에서 절대적 의미를 발견한다. 돌은 모든 변화를 버텨내며 영원히 존재하는 사물로 밝혀지며, 그 자체가 이미 위대한 기념비적 존재자로 지어져야 한다. 또한 질서는 수직과 수평의 직교구조의 엄격한 만남이 절대적 균형을 이루는 삼각형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영원한 질서는 비교될 수 없는 규모로 초월화되는 것이다.
이집트의 풍경이 담고 있는 영원성과 질서는 거석과 수직․수평의 절대적 균형인 삼각형이 만나는 거대한 불가사의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것이 바로 대 피라미드이다.
카이로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기자의 대피라미드는 인간에 의해 지어진 거대하고 영원한 돌덩어리이다. 그것은 가로와 세로의 길이가 230m이고, 높이는 146.6m에 이른다.
물론 역사학자들이 밝혀놓은 바에 따르면, 처음부터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를 대피라미드와 같은 형태로 구상하고 지은 것은 아니다. 대피라미드가 지어지기 까지 여러 차례의 좌절과 실패의 역사가 있었다. 그런 좌절과 실패를 극복한 이집트인들은 수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앞에선 인간들을 압도적인 경이로움으로 사로잡는 거대하고 위대한 형상을 완성시켰다.
대피라미드는 풍경의 중심을 형성하는 탁월한 신성한 사물이 부재하는 사막에서 바로 그 부재를 극복하는 건축물로 풍경을 모으는 초점이다. 그런의미에서 그것은 어쩌면 산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피라미드는 이렇게 산과 같이 하늘과 땅을 결연하고, 동시에 태양을 받아들이는 수직축으로서 역할을 담당하며, 실재 산에 버금가는 터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때문에 슐츠는 피라미드를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최초의 산인 벤벤과 연관시킨다. 이집트는 작열하는 태양을 향해 구축된 문화이다. 태양의 최고의 신이며 이 신의 이름은 라(ra)이다. 라는 4명의 딸을 낳았는데 마트라는 딸이 법과 질서의 여신으로서 이 여신에 의해 우주는 질서를 갖게 된다. 그리고 이 Ra의 아들이 바로 태양의 왕국의 최고 권력자 파라오이다. 그런데 라를 탄생시킨 아툼은 최초에 혼돈의 바다 누(Nu)에서 벤벤이란 동산이 솟아오르면서 창조되었다고 한다. 결국 우주가 혼돈이 아니라 인간이 살 수 있는 공간으로 형성된 것은 벤벤이라는 산의 출현 때문이다. 파라오의 영원한 집인 피라미드는 바로 그러한 신성한 산의 풍경으로 밝혀진다..
피라미드가 영원한 집이며 동시에 사막에 부재하는 신성한 사물, 산과 같은 풍경으로 드러난다 점은 역설적으로 산이 실재하는 풍경에 영원한 집, 즉 장제 사원을 지을 때 이집트인들은 전혀 다른 건축물을 지었다는 사실과 연관될 것이다. 가령 실제로 산이 이미 풍경의 중심으로 풍경을 형성하고 있을 때, 이집트인들은 인위적으로 산을 지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풍경에서는 영원한 집, 즉 사원을 지을 때, 이미 그렇게 존재하는 산의 신성함을 조금도 훼손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지어진 건축물과의 대조를 통하여, 산이 구현하고 있는 존재론적 의미, 즉 하늘과 땅의 모임이 강렬하게 현시되는 수직성과 높이를 더욱 두드러지게 가시화하는 방식이 선택되었다.
이는 왕가의 계곡과 가까운 데이르 엘-바하라Deir el-Bahara 소재의 하세슈트Hatshepsut 여왕의 장제사원에서 목격된다. 물론 피라미드가 더 이상 지어지지 않고 왕들의 무덤이 이 계곡 어디엔가 찾기 어렵게 조성된 것은 피라미드가 수도 없이 당한 도굴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밝혀진 사실이다.
왕가의 계곡은 자연이 지은 피라미드처럼 보이는 알 쿠른(Al-Qurn) 산의 북쪽 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그 산의 동쪽 사면에 지어진 하세슈트의 장제 신전의 형태는 의미심장하다.
여기서 사원은 벤벤동산 혹은 피라미드처럼 출현하는 그 산을 배경으로 마치 그 산 자체가 신전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원래의 주 건물인 듯, 그리하여 실제로 지어진 신전은 마치 그 산의 부속건물처럼 산에 종속되어 있다.
사원은 피라미드와는 달리 수평의 형태를 취하는 세 개의 테라세로 이루어져 산의 수직성과 극적인 대조를 이룸으로써 산의 초월적 풍경을 강렬하게 표출시키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슐츠의 풍경현상학을 가이드로 하여 돌아보는 짧은 이집트 여행을 마친다. 사막과 나일강 그리고 하늘에서 작열하는 태양이 어우러지며 인간을 정착으로 초대하는 풍경의 영혼은 이집트라는 문명으로 발전하였고 그 문명의 절정인 피라미드는 그 풍경의 영혼을 새기고 있는 것이다. 다음 여행지는 신화의 땅 그리스이다.
필자: 이종관
성균관대 철학과 교수. 성균관대 하이브리드 미래문화연구소 소장. 미래인문학 주임교수. 첨단과학기술과 관련된 도시, 경제, 문화 예술 문제를 미래인문학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주요저서: 포스트휴먼이 온다. 공간의 현상학, 건축, 그리고 풍경. 사이버문화와 예술의 유혹. 디지털 철학 등
4.고귀한 여행을 떠나기 위한 사전공부: 마무리
2022.06.04. 오후 10:17 by 이종관
“장소의 혼”이라는 저서로 현대 기능주의적 건축에서 훼손된 인간과 풍경 그리고 건축과의 관계를 치유하려 했던 크리스티안 노르베르크 슐츠(23 May 1926 – 28 March 2000),
그는 노르웨이에서 태어난 건축가이며 또 건축이론가이다. 현상학적 공간론에, 특히 하이데거의 예술철학과 공간의 현상학에 깊은 영향을 받은 그는 풍경과 인간의 거주, 그리고 건축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통찰한다.
“거주는 모든 것에 대해 시적․현상학적 태도를 전제한다. 건축이란 작업의 도움으로 (…) 인간은 시적으로 거주한다. 인간은 사물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을 때, 그리하여 그가 이해한 것을 건축의 언어로 작품화할 수 있을 때 거주한다."
이를 이제 좀더 이해하기 쉽게 풀어보자.
인간의 거주는 우선 당연히 정착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인간이 정착지를 선택하는 것은 인간의 자의에 따른 것이 아니라, 풍경이 그를 초대할 때이다. 즉, 인간은 서식지를 찾는 것이 아니라 거주지를 찾는 것이다. 거주는 생존현상이 아니라 실존현상이며, 이러한 실존현상으로서의 거주는 존재의 문제와 관련되었다. 따라서 인간의 거주는 존재의 의미가 뚜렷해지는 곳에 정착하기를 원하며, 이러한 정착은 존재의 의미가 직접적으로 구현되는 사물에 머물면서 시작된다. 이미 지난 회에 언급한대로 사물을 하늘, 땅, 신성함, 죽을 운명의 존재자의 모임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사방으로서 사물성이 가장 뚜렷하게 현시되는 사물은 산, 물, 숲이다. 슐츠는 이를 하이데거의 언어철학을 따라 신화를 시학적으로 접근함으로써 해명해낸다.
즉, 인간이 출현한 곳에서는 어디에서든지 발견되는 신화를 단순히 미개한 인간의 심리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라는 편견을 떠나서 우리와 같이 실존하며 자신들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과거 인간들이 그들이 처한 세계를 해석한 언어현상으로 이해하면, 신화는 인간 존재의 문제를 해명해 들어가는 탁월한 통로로 트인다. 슐츠는 신화에 대한 이러한 그의 태도를 신화-시학(mytho-poetic)이라 명한다. 그리고 적어도 인간이 인간으로서 거주하기 시작한 시원적 시점과 때를 같이 하는 여러 신화들을 신화시학적으로 독해함으로써 하나의 공통점을 찾아낸다. 그것은 고대 신화에서 풍경은 단순한 관망의 대상이 아니라 어떤 힘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으며, 하늘과 땅의 혼인을 통하여 사물들이 탄생하는 것으로 기술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산과 수목은 하늘과 땅이라는 원천적 힘들이 어우러지는 존재의 근본 현상으로 다가와 사물 중의 사물로서 풍경의 중심으로 신성시된다. 또한 물은 바로 생명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풍경의 성격을 결정하는 사물로서 경배된다.
우리가 아는 여러 문화권의 신화에서 산은 세계의 중심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파르나소스 산과 올림푸스 산이 중심으로 펼쳐지고 스페인 카탈루니아의 옛신화에서는 바르셀로나에서 50Km에 위치한 몬세라트 산이 그 지역 풍경의 중심이다.
우리나라의 신화 역시 예외가 아니다. 태백산, 백두산등 우리나라 신화에 등장하는 이 산들은 이 땅에 인간의 거주가 시작될 때 그 거주 공간의 중심을 형성한다.
호주 원주민 신화에서도 울루루라는 산이 그 원주민 문화의 성스러운 중심으로 경배되고 있다.
또, 산과 같이 수직적 세계 축을 상징하는 나무 또한 중심이 된다. 분지나 계곡은 땅이 하늘을 받아들이는 거대한 용기와 같은 모습을 지녔다.
그리고 호수나 만은 물의 표면에서 땅과 하늘의 모임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점에서 이것들은 중심의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최초의 인간에게 산, 수목, 호수와 같은 사물들에서 사물성이 가장 탁월하게 현재하는 것으로 드러나며, 풍경은 이러한 사물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풍경의 중심을 형성하는 사물들은 신성성을 발하며 죽을 운명의 인간을 거주로 초대한다. 즉, 인간의 거주는 이렇게 사방으로서의 사물성이 뚜렷한 곳에서 정착으로 초대받으면서 시작되어 마을을 형성한다. 이러한 마을은 풍경으로부터 초대를 통해 지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풍경과 밀착된 관계 속에 있다. 풍경과 마을은 상응관계 속에 있으며, 풍경의 의미가 마을 속으로 스며든다. 즉, 마을의 형태와 자연적 풍경의 조건은 서로를 머금는 관계를 갖고 있다.
풍경의 분류
풍경은 하늘과 땅이 어떤 방식으로 어우러지는가 가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풍경의 뚜렷한 특성은 펼쳐져 있음이다. 이러한 풍경이 어떻게 펼쳐지는 가는 땅과 하늘에 의해 결정된다.
땅: 땅은 지표면이 드러내는 기복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거칠거나 혹은 우호적인 성격의 풍경은 땅의 표면적 기능이 이루어내는 효과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다시 질감, 색깔, 식생에 의해 강화될 수도 또 약화될 수도 있다. 질감과 색깔은 모래, 흙, 바위, 풀, 물과 같은 땅의 질료성과 관련이 있으며, 식생은 지표면의 기복을 결정하는 데 추가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다. 예컨대 식물이 자라고 있는지 여부에 따라 유사한 지표 기복이 비옥한 평원의 삭막한 황야로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늘: 하늘은 마치 땅의 기복을 실루엣으로 드러내는 스크린처럼 땅과 관계한다.
하늘이 없으면 땅은 그 성격을 드러내지 못하며 풍경 또한 열리지 않는다. 하늘과 땅은 서로가 서로를 드러나게 한다. 물론 하늘이 풍경의 성격을 결정할 때 발휘되는 역할은 일상적으로 간과되기 쉽다. 하지만 낯선 지역에 들어설 때, 하늘에 의해 밝혀지는 분위기는 색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슐츠는 하늘이 발하는 효과가 두 요소에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첫째는 빛과 색 그리고 구름이며, 둘째는 땅과의 관계, 즉 그것이 지상에서 어떻게 보이는가이다. 광활하게 열린 평원에서 하늘은 온전한 반구로 드러나며, 특히 날씨가 쾌청할 때, 그것은 모든 것을 끌어안는 장엄한 광경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현저한 기복이 있거나 식물이 풍성하게 자라는 곳에서는 시간에 따라 일부만 보일 뿐이다.여기서 공간은 다양한 형태로 구분되어 서로 접촉되며, 풍경은 인간적 스케일을 크게 넘지 않는 친밀한 광경으로 다가오거나 응축된다. 이러한 하늘은 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 지표면의 기복이 그 윤곽선을 획득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 따라서 풍경의 성격은 하늘에 대비되는 실루엣으로 결정되어 때로는 부드럽게 물결치듯 때로는 들쭉날쭉 거칠게 선명해진다.
땅과 하늘이 만나 이루어내는 풍경은 낭만적, 우주적, 고전적, 복합적 풍경 4가지로 나뉠 수 있다.
1)낭만적 풍경은 지표면이 연속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다채로운 기복을 가지고 이를 통해 땅은 미시적구조를 산출한다. 이때의 하늘은 제한적으로 노출되고 구름에 의해 끊임없이 분위기가 변한다. 문학이나 예술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작품은 낭만적 풍경에서 영향을 받았고 그 영향이 예술로 표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우주적 풍경은 무한한 광야로 펼쳐지며 이러한 단조로움은 절대적인 영원한 질서를 헌시한다. 사막이 대표적인 예인데, 사막의 땅은 모든 것을 탈진시키며 충분한 실존적 토대를 제공하지 않는 중성화된 지대이다.
3) 고전적 풍경은 서로 다른 풍경들이 잘 배열되어 있고 선명하게 경계지어진 자연적 공간들을 가지고 있다. 고른 대기와 고른 빛은 적당한 수준으로 사물들을 뚜렷이 나타내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인간과 자연이 동등한 동반자로 있는 것이 거주지로서 적합하기에 고전적 풍경이 가장 거주의 근원적인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4) 대개 풍경은 세 전형이 복합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풍경을 복합적 풍경이라고 한다. 세 풍경이 서로 어우러져 통일된 전체를 이룬다. 우리나라는 대체적으로 고전과 낭만 사이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다채로운 풍경들이 도를 넘지 않는 선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지금까지 한 공부를 몇줄로 요약해보자.
우리가 살아 가는 거주는 건축물을 짓고 땅과 하늘 아래 정착하는 것이다. 그리고 건축물을 통해 비로소 자연이 풍경으로 드러나며 그 성격과 분위기가 선명하고 더욱 충만해진다. 우리는 이제 인간과 풍경 그리고 건축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진술하는 슐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풍경을 받아들이고, 그 풍경은 구체적 건물로 초점화된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 주변의 디테일들이다. 디테일들은 풍경의 성격을 설명하고, 따라서 의미를 드러낸다. 장소의 혼genuis loci 역시 인간에 의한 구체화를 필요로 하며, 사실상 그러한 뚜렷한 영향manifest influence을 통해 알려진다. (…) 인간은 풍경에게 어떤 것으로말을 걸며, 풍경은 그 응답으로 그의 사물을 보다 큰 의미 맥락으로 통합시킨다.”
이로써 고귀한 여행을 위한 사전 공부를 이정도로 마치기로 하자. 다음회 부터는 슐츠의 풍경현상학을 통해 달라진 우리의 눈으로 사물과 풍경 그리고 인간의 거주를 돌아보는 여행을 떠나기로하자.
필자: 이종관
성균관대 철학과 교수. 성균관대 하이브리드 미래문화연구소 소장. 미래인문학 주임교수. 첨단과학기술과 관련된 도시, 경제, 문화 예술 문제를 미래인문학의 관점에서 젊은 연구원들과 함께 연구하고 있다.
주요저서: 포스트휴먼이 온다. 공간의 현상학, 건축, 그리고 풍경. 사이버문화와 예술의 유혹. 디지털 철학 등
3.고귀한 학문으로서의 여행을 하기 위한 사전 공부: 풍경 현상학
2022.06.02. 오후 6:33 by 이종관
고귀한 학문으로서의 여행을 떠나기 위해 그리고 그 여행에서 풍경의 영혼과 함께 하며 그 풍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풍경에 들어설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들어서는 상황을 영어로 under-stand라고 한다. 이 때 길잡이가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풍경의 현상학이다. 풍경은 자연을 물리적 공간으로 접근하는 방식으로는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으며 따라서 풍경에 들어설 수 없다. 풍경을 물리적 공간과 구별해내고 인간과 풍경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다시 밝혀내는 현상학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번회와 다음회에는 풍경의 현상학을 최소한의 시간을 들여 공부할 것이다. 그런데 이 풍경의 현상학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풍경현상학을 향한 진입로를 마련하기 위해 이전회에서 살펴본 동대문 DDP의 공간성에대해 단도직입적으로 설파하며 공부를 시작하기 위한 출발점을 발견한다.
동대문 DDP의 건축적 상상력의 심층에는 사실 상대성이론의 물질공간론이 깊이 숨겨져 있다. 그러나 인간은 물질로 만들어진 물체인가. 인간이 어디에 있고 어디로 향하고 또 어디로 돌아오는 것이 물리적 공간에서 굴러다니는 돌과 같은 방식인가. 그리하여 인간도 상대성이론이 말하는 그 공간에서 질량분포법칙 지배를 받기에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또 다른 물체인 건축물도 굴곡의 공간으로 지어져야 하는가. 자하하디드가 지은 그 DDP에서 우리 인간은 물체와 같은 방식으로 운동하는 존재로 취급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하여 그 공간은 그 현란한 물질적 역동성으로 오히려 삶의 모든 것을 다 지워버린 빈곤한 경관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그 삶의 기억도 지워지고 결국 그 기억과 함께 가야할 미래도 지워진 것이 아닌가.
인간은 어디에 사는가: 실존, 사물, 그리고 풍경
대체 인간은 어디에 사는가.인간은 물체처럼 아인스타인 공간에 사는가? 우선 가장 분명한 것은 인간은 물체와 달리, 또 동물과 달리, 살면서 항상 자신의 삶의 의미를 문제 삼는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생존본능에 매몰되어 있는 동물과는 달리 자신 삶은 언젠가는 끝난다는 안다. 그러기에 사람은 이러한 유한한 삶 속에서 잘 살기 위해 어디에 살아야 하며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물어가면서 존재하는 존재이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의 이러한 독특한 존재방식을 다음과 같이 절묘하게 표현했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 속에서 그 자신의 존재가 문제가 되는 존재자이다.”라고. 그리고 이러한 사람의 독특한 존재방식을 단순한 있음, 또 생존과 구별하기 위해 실존existenz이라고 불렀다.
인간의 거주는 생존과정이 아니라 실존과정이며, 이러한 실존과정으로서의 거주는 존재의 문제와 관련함으로써만 거주한다. 죽을 운명의 존재인 인간의 거주는 그의 삶과 죽음과 관련된 절실한 존재의 의미가 뚜렷해지는 곳에 정착하기를 원하며, 이러한 정착은 존재의 의미가 직접적으로 구현되는 사물에 머물거나 사물을 지으면서 시작된다. 이때 사물은 아무 의미도 없는 물질 덩어리이거나 혹은 교환가치를 떠올리게 하는 자원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사물의 원래 뜻을 찾아가보면 ‘모은다’라는 의미를 만난다고 한다. 사물이란 말이 시원적으로 주어졌을 때, 그 의미에 귀 기울이면, 사물은3차원적 절대적 공간 안에 연장되어 있는 물질적 덩어리 혹은 무엇으로 가공될 재료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사물이란 뜻의 독일어 Ding의 시원을 따라가면 Ding은 원래 thing이며 이 말에는 원래 ‘모은다versammeln’라는 의미가 스며있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모이는가? 하이데거는 우리가 늘 사용하는 어떤 일상적 사물을 바라보며 그것의 사물성을 그 원래 뜻에 귀환시켜 시적 언어로 기술하며 다음과 같이 사물의 사물성을 명징하게 밝혀낸다. 그 일상적 사물은 바로 포도주를 담는 단지이다.
“샘에는 바위가 거주한다. 그리고 바위에는 땅이 잠들어 있어 하늘에서 내라는 빗물과 이슬을 받아낸다. 샘물에는 하늘과 땅이 결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샘물은 와인에 머물고 있는데 이 와인은 포도가 선사한다. 포도는 땅의 자양분과 하늘의 햇빛이 서로에게 스며들 때 영근다. 그리고 술단지는 부음을 선사할 때 단지로 존재한다. 단지가 단지로 존재할 때 따라서 단지 안에는 하늘과 땅이 거주한다. 포도주 단지에서 포도주가 부어지는 것은 죽을 운명의 인간에게 마심을 선사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여유와 생동감 있는 여흥을 선사한다. 그러나 포도주는 성사에도 바쳐지는데 이때 포도주는 갈증을 적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축제를 승화시킨다. (…) 이때 포도주는 인간에게 마실 것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신에게 헌사되는 것이다. (…) 결국 술잔에 술이 부어져 선사될 때 하늘과 땅, 신성함과 죽을 운명의 인간이 함께 거주하는 것이다.”
철저한 현대인의 입장이라면 포도주는 화공학에서 그 진리가 밝혀지고 따라서 화공학을 동원하면 하루에 수천 만병까지도 포도주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포도주일까.
우리가 바라는 포도주는 하늘에서 비가 내려 땅으로 스며들고 그것이 포도를 꽃피우고, 농부가 이 포도를 만나 노동을 해서 적절한 자연시간을 기다리는 가운데 발효의 과정을 거처 탄생한 포도주이다. 포도주는 이렇게 하늘에서 내리는 비, 그 비를 머금어 석회암반에 샘물로 모으는 땅, 그리고 또 하늘에서 빛나는 햇볕, 인간의 노동 등 하늘과 땅과 인간이 어우러지며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포도주를 원래 인간은 신에게 바쳤다. 그를 위해 인간에 의해 제작된 것이 포도주 단지이다. 포도주 단지는 어떤 화학적 액체인 포도주를 담는 용기가 아니라 포도주를 신에게 바치기 의해 인간이 정성을 드려 포도주 잔을 디자인했다. 포도주잔이란 사물이 원래 어떤 것이었는지 지금은 모두 망각되었지만 원래 사물은 이렇게 인간이 개입해 하늘과 땅이 모이고 거기서 일어나는 사건을 신에게 바치는 것이다. 즉, 사물에는 사방이라 불리는 하늘, 땅, 죽을 운명의 인간, 신성한 것 이 4가지가 어우러지며 그때 그때 마다 사물안에서 관계하면서 밀집되어있다.
포도주를 담는 그 술단지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그리고 그저 공간에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물체도 아니다. 하늘에서 내린 빗물이 땅에 스며들어 포도나무가 자라면, 포도가 영근다. 그 포도로 포도주를 담근 인간이 단지 안에 포도주를 담아, 언젠가는 죽을 자신의 운명을 넘겨주어야 할 신에게 헌사한다. 그때 그 단지라는 사물은 그 안으로 하늘과 땅, 죽을 운명의 인간과 신이 서로에게 스며들며 머무는 장소이다. 이렇게 사물은 그 안으로 하늘과 땅, 죽을 운명의 인간과 신성함이라는 사방이 응결되고 잉태gebären됨으로써 비로소 자기 자신 속으로 실현되며 자기 자신으로 있게 된다. 사물은 하늘과 땅, 신성함과 죽을 운명의 인간이 바로 거기에 어우러지는 사방의 모여듦이다.
풍경을 형성하는 4 축, 4방: 하늘, 땅, 죽을 운명의 인간, 신성함
그런데 하이데거가 사방에서 거론하는 땅, 하늘, 신성함, 죽을 운명의 인간은 또 무엇인가?
땅은 단지 지질학적 존재자로서 화학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이미 만물이 잉태되어 있으며 만물은 땅으로부터 태어난다. 모든 사물은 이 땅이 베푸는 자양분으로 태어나고 자라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땅은 모든 사물에 스며있다. 아주 작은 미물에서 거대한 산하에 이르기까지, 미천하고 볼품없는 것으로부터 아름다운 꽃, 그리고 산야를 누비는 동물들에 이르기까지. 비록 그것이 무엇인지 어둠에 묻혀있지만.
하늘 역시 천문학적 대상이 아니라 푸른 반구의 모양으로 땅을 감싸며 태양이 뜨고 지는 길을 내어주고, 달이 그 모습을 달리 보여주는 궤도를 열어주며,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허락한다. 또한 흘러가는 구름과 비, 계절의 변화, 이슬비와 폭우, 싱그러운 바람과 폭풍이 바로 이 하늘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푸른 에테르로 채워져 한 없이 드높으며 따라서 하늘은 결코 도달할 수 없어 하늘이 내리는 모든 것들은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그런 영역이다.
그리고 바로 이 하늘과 땅 사이에 죽을 운명의 존재자가 있다. 그것은 인간이다. 오직 인간만이 죽음을 죽음으로서 받아들이며 이렇게 죽음이 오면 언젠가 그는 그의 운명을 넘겨주어야 할 신성의 여지가 어디엔가 있음을 감지한다. 신적인 것들은 이렇게 어디엔가 있을지 모르는 신성을 암시하는 눈짓이다. 그것들은 신성의 사자로 때로는 나타나며 때로는 숨으면서 죽을 운명의 인간에게 물러서듯 다가오며 다가오듯 물러선다.
하늘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한없는 광활함과 더 없는 드높음이지만 하늘에서 내리는 모든 것은 그자체로만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땅으로 스며들어 잉태되면서, 땅이 베푸는 자양분으로 태어나고 자라는 사물이 된다. 그러나 이렇게 태어나고 자라는 사물은 죽을 운명의 인간이 없으면, 그 위대한 하늘과 땅이 어우러져 그것을 탄생시킨 신성함으로 귀환하지 못한다. 오직 죽음을 죽음으로 받아드리는 인간만이 자신의 운명을 넘겨주어야 할 신성함을 발견하고 사물을 그 신성함에 헌사하기 때문이다.
한편 죽을 운명의 인간은 사물에 의탁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죽을 운명의 인간은 그의 존재가 의탁하고 있는 사물들을 신성함으로 귀환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신성함으로 넘겨주지 못한 채 그가 소모하는 사물들과 함께 다만 소모되며 내 팽겨 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치 막가는 인생처럼….
하늘은 이렇게 죽을 운명의 인간과 함께 할 때만 높고 늘진 하늘로서 땅과 사물을 아우르며 그 사이를 신성함으로 채운다. 그래서 하늘은 죽을 운명의 인간으로 진정하게 사는 자에게 다음과 같이 부르는 것이다. “높고 늘진 하늘이 나더러 함께 살자 하더라” 하망연이란 노래의 한 구절이다.
그리고 이 가사를 들을 때 우리는 한 유행가가 아니라 하늘의 의미를 비로소 찾으며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운명 앞에선 자신이 불리어진 듯 그 비장함에 감동 받는 것이다.
이렇게 하늘과 땅, 죽을 운명의 인간과 신성함은 서로에게 접혀 들어가며Einfalt, 서로를 결여할 수 없이 모여 있는 것이다. 즉 사방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비추며 모임으로써 비로소 각기 그 고유한 자신으로 일어나는 존재의 근원적 방향성이다. 따라서 사물이란 말을 원래 의미에 귀 기울이면, 사물은 3차원적 절대적 공간 안에 연장되어 있는 물질적 덩어리 혹은 무엇으로 가공될 재료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사물은 하늘과 땅, 신성함과 죽을 운명의 인간이 바로 거기에 어우러지는 사방의 모여듦이다.
사물을 이렇게 근대인식론으로부터 나아가 근대과학으로부터 풀어내어 그 원래의 뜻에 귀환시켜 만나면, 사물은 연장된 공간에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물체도 아닌, 하늘, 땅, 죽을 운명의 인간, 그리고 신성함의 모임으로 밝혀진다.
사물에는 사방이라 불리는 하늘, 땅, 죽을 운명의 인간, 신성한 것 이 4가지가 어우러지며 그때 그때 마다 사물안에서 관계하면서 밀집되어있다. 그러나 하늘과 땅, 죽을 운명의 인간 그리고 신성한 것은 각각 그 자체로 존립할 수 없다. 관계 속에서 비로소 형성되어, 관계가 존재성보다 우선한다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존재하는 사물에는 사방이 모여 어우러지는데, 이들이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사물의 분위기가 바뀐다.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렇게 하늘, 땅, 죽을 운명의 인간, 그리고 신성한 것이 나름의 방식으로 모여 분위기가 있는 것이고, 만남의 양태에 따라 다양한 분위기를 갖는 풍경이 사물을 중심으로 형성될 수 있다. 그렇기에 사물과 만난다는 말은 사물이 열어놓은 어떤 분위기의 장소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풍경과 중심사물들, 그리고 장소의 영혼
그런데 사물을 그 원래 의미에 따라 하늘, 땅, 신성함, 죽을 운명의 존재자의 모임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사방으로서 사물성이 가장 뚜렷하게 현시되는 사물은 산, 물, 나무 등이다.
인간에게 산, 수목, 물과 같은 사물들에서 사물성이 가장 탁월하게 현재하는 것으로 드러나며, 풍경은 이러한 사물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풍경의 중심을 형성하는 사물들은 존재론적 의미의 초점으로서 신성성을 발하며 죽을 운명의 인간을 거주로 초대한다. 인간의 거주는 이렇게 사방으로서의 사물성이 뚜렷한 곳에서 정착으로 초대받으면서 공동의 삶이 시작되는 터를 형성한다. 인간의 삶이 일어나는 그러한 장소는 항상 어떤 존재는 것들이 이루는 의미가 발현되어 있다. 노르웨이의 건축 현상학자 크리스티안 노르베르그 슐츠는 이렇게 발현된 의미를 고대 로마인들의 말을 빌어 장소의 영혼(Genius Loci)이라고 부른다.
필자: 이종관
성균관대 철학과 교수. 성균관대 하이브리드 미래문화연구소 소장. 미래인문학 주임교수. 첨단과학기술과 관련된 도시, 경제, 문화 예술 문제를 미래인문학의 관점에서 젊은 연구원들과 함께 연구하고 있다.
주요저서: 포스트휴먼이 온다. 공간의 현상학, 건축, 그리고 풍경. 사이버문화와 예술의 유혹. 디지털 철학 등
2.동대문DDP와 비정형건축의 풍경
2022.06.02. 오후 6:08 by 이종관
동대문DDP, 뭐라고 정의할 수 없는 스타일을 거침없이 노출하는 역동적 풍경의 건축물.
동대문 DDP는 디자인 시티 서울의 핵심 사업이었다. 서울을 매력적인 도시로 미화하여 세계의 이목을 끌기 위한 시도였다. 이를 위해서 시대의 건축들 선도하는 첨단 유행에 순발력있게 탑승하는 방법이 선택되었다. 그때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비정형건축이라는 최신유행 건축이었으며 당시 이 유행의 첨단에 서 있는 건축가는 몇 년전 타개한 자하하디드라는 스타건축가였다. 결국 하디드에 의해 우리의 동대문 지역이 DDP라는 건물로 점유될 것이라고 선언되었다..
하디드 줄곧 주장하였다. 전세계인 탄복하는 서울의 역동성을 담아내기 위해 동대문은 과거의 모습을 완전히 철거한 채 어디로 튈지 모르는 형태의 비정형적 경관이 되어야 한다고.
그런데 대체 하디드의 비정형 건축은 무엇이며 그것은 정녕 우리가 삶을 사는 거주의 풍경에 그렇게 자리잡을 정당성이 있는가? 물론 비정형 건축의 양태도 매우 다양하다. 그럼에도 대체적 경향은 건축의 핵심을 이루는 공간의 문제가 과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즉 과거 건축물은, 특히 근대 이후 20세기 전반부까지의 건축을 보면, 주로 완벽한 직선, 완전한 원 등 정형화된 도형을 구현하고 있다. 이에 반해 현대 건축에서는 이러한 공간 형태가 파격적으로 해체되고 있다. 오히려 구부러진 공간의 자유로운 변주가 소위 이 시대의 스타 건축가로 칭송되는 건축가들에게서 목격된다. 요컨대 구부러진 공간의 자유로운 변주에서 건축물은 접힘과 펼침의 굴곡이라는 드라마로 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건축물에 접힘과 펼침, 굴곡의 드라마라는 파격적인 공간적 형태를 부여하는 건축의 대표적 인물이 바로 자하 하디드이다.
하디드의 작품은 일견 마치 공상과학 영화의 세트와 같이 우리의 상식적 공간 경험을 전복시키는 형태를 보여준다. 그러나 하디드의 건축미학이 공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면, 그리하여 단순한 세트가 아니라 실재 공간에서 사는 우리의 삶을 담는 건축물이라면, 그 공간적 구조는 실재 공간의 법칙에 의해 타당성을 보장받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건축계의 이론가로 주목받고 있는 건축가이자 가구 디자이너인 베르나르 카쉬Bernard Cache를 경청해보자. 그의 다음과같은 진술은 하디드의 건축적 공간이 어떤 근본 가정에 근거하고 있는지 시사한다. “세계가 빈 공간의 선형적 형태가 아니라 휘어져 있다면, 실체의 표면과 질감은 서로 휘감아 돌며 펼쳐지는 전개 양상을 보일 것이다.”
세계가 근본적으로 휘어진 공간이라는 것은 허황된 상상이나 철학적 사변에 불과한가? 아니면 과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사실인가?
현대 과학에 대해 일말의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우주공간이 실제로 휘어져 있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때 과학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새롭게 출현하는 바로 그 과학이다. 이른바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질량분포의 법칙이라는 새로운 공간론은 이렇게 실재 공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특히 공간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는 건축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 밝혀진 새로운 공간 개념을 실재의 공간으로 수용하고, 건축도 그러한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작업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하였다. 아인슈타인의 이러한 상대성이론은 건축 공간을 이질적 공간으로 분할하고,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굴곡으로 변이하는 공간을 건축의 장에 도입하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다. 상대성이론의 출현 이후 나타난 새로운 건축의 경향은 그 이후 많은 건축가들의 작품 속에서 암묵적으로 혹은 명시적으로 시사된다.
자하 하디드는 건축 공간을 조형하는 데 명시적으로 아인슈타인의 공간론에 기댄다. 그녀가 아일랜드 수상의 관저의 설계안에서 구상한 작품은 그 대표적 증거이다. 이 작품은 공간형태, 힘, 운동의 관계를 오직 아인슈타인의 질량분포의 법칙에서 도출되는 힘과 형태의 양상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 공간은 더 이상 정적이고 고정된 형태로 머무르지 않는다. 하디드에게 공간은 그 자체로는 빈 상태가 아니다. 또 힘도 그 공간의 형태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그 안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하여 이 설계안에는 공간, 에너지, 그리고 물질의 직접적인 관계가 상정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작품에서 중력은 빈 관성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방향을 갖고 있는 역학의 영역으로 형태를 뒤틀면서 동적으로 배열한다.
자하 하디드는 대만 타이중 구겐하임 미술관의 설계안에서 자신의 작품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근거하고 있음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 제안서에서 미술관은 늘 변화하는 이벤트 공간임이 고려되어 건물에 가변무대 같은 장치가 설치되었다.또한 갤러리 내부의 공간을 탈바꿈시키는 기능이 강조되고, 나아가 이러한 공간의 드라마틱한 변화를 외부에도 가시화하여, 그 자체를 하나의 스펙터클로 연출해내려 한다.
특히 미술관의 천장과 바닥까지도 지속적인 움직임 속에 놓여 있다. 이로 인해 방문객들은 각기 다른 속도로 추진되는 기차를 타고 미술관 안으로 이동하면서 정지와 운동을 구분할 수 없는 모호한 상태에 빠진다. 이렇게 미술관이란 공간 전체가 상대적 속도와 그에 따른 공간의 변형을 실현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디드의 공간 상상력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상대성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건축의 상상력의 심층에 있는 상대성이론의 타당성 근거를 되물어가는 작업 없이, 그리고 이것이 인간의 삶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반성 없이, 이러한 건축들은 아인슈타인이라는 절대적 명성을 추종하는 것에 불과하다.
즉, 그것은 마치 상대성이론이라는 SF를 건축이라는 스크린에 상영하는 쇼케이스showcase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생생하게 진행되는 우리의 삶이 거주하는 건축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필자: 이종관
성균관대 철학과 교수. 성균관대 하이브리드 미래문화연구소 소장. 미래인문학 주임교수. 첨단과학기술과 관련된 도시, 경제, 문화 예술 문제를 미래인문학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주요저서: 포스트휴먼이 온다. 공간의 현상학, 건축, 그리고 풍경. 사이버문화와 예술의 유혹. 디지털 철학 등
1.풍경의 영혼을 찾아 떠나는 고귀한 여행
2022.06.02. 오후 5:54 by 이종관
길 떠나는 자, 그는 어디로 떠나는가?
떠나자! 디지털공간 디지털 혁명 너무 지겹다. 디지털 공간, 바람도 없고 하늘도 없고 땅도 없는 그 공간. 얼마나 살겠다고 죽을 운명의 인간이 하늘과 땅을 버리겠는가. 길을 떠나자. 길을 찾기 위해...
"하늘에서 별이 빛나면, 땅 위에 이슬도 빛난다.
이것이 내가 배운 첫번째 철학이다. "(사람아, 아 사람아!
다이 호우잉)
집시! 늘 떠도는 자들. 그들의 삶은 고난 고통과 역경이다. 그러나 그 고통스런 삶 속에서도 그들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열정과 슬픔의 미학을 창조한다. 그래서 그들은 멸시 받으면서도, 예술가들에게는 일상을 늘 탈출해있는 자들로, 또 영감의 존재로 찬미된다. 리스트가 그랬고, 헤리 멘시니가 그랬고 심지어 철학자 니이체 마저 유럽인들의 창백한 지성을 비웃으면서 카르멘을 찬미했다.
나도 그렇다. 집시의 음악을 들을 때면, 갑자기 딴 세계로 매혹되듯 아니 어쩌면 잊어버렸던 본래의 자기를 찾은 듯 일상의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그리움과 열정, 길 떠나는 자의 자유로움에 휩싸인다.
안다. 사실 집시의 삶은, 그들이 떠나는 이유는, 정착할 곳을 허용받지 못해서 늘 쫓겨난 도정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도정에 그들은 삶의 위협에 시달리고, 굶주리고, 그러다 생존을 위해 싸우기도 하고, 속이기도 구걸하기도 하고, 또 훔치면서 그렇게 비루하게 산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들은 일상에 묻혀 일에 파묻혀 사는 자들에게는 현실계가 아닌 상상계의 거주자로 다가온다. 단지 그들은 늘 떠난다는 이유로.
일상인들 그들은 집시를 닮고 싶은 듯, 떠나고 싶어한다. 그들은 대체 왜 떠나고 싶은 것 일까.
인간은 왜 여행을 떠나는가? 사실 여행은 현실로부터 해방되는 상상계로의 탈출만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진리를 향한 도정이기도 하다. 이미 옛 선인들은 여행이 진리를 향해 가는 인간의 특권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선인들은 전한다. 만권의 책을 읽고 또 만리를 여행하면 득도한다고.
옛 동양의 선인들 뿐만이 아니다. 서양의 현대 지식인들도 여행은 진리를 향한 길 떠남이라고 전한다. 페스트와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까뮈는 이렇게 쓰고 있다.
"여행, 그 고귀한 학문! 그것은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 인도한다.”
이제 우리는 그 고귀한 학문으로서의 여행을 떠나려 한다.
그리고 그 여행을 통해 우리 자신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여행이 끝난 후 우리가 찾은 우리 자신이 어떤 자신인지를 알기위해서는, 여행을 떠나기 전 우리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거울은 우리 방에 걸려 있는 거울 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이다. 윈스턴 처칠이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도시는 인간이 만들지만, 그 도시가 또 인간을 만들기" 때문이다. 건축가 팔라스마도 같은 의미로 설파한다.
"나는 도시안 살고 그 도시는 내 안에 산다."
실로 도시에 사는 인간 공동체의 욕망과 요구는 지어진 도시의 분위기와 구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도시를 짓는 건축은 도시 공간의 거의 모든 영역과 그곳에 사는 인간의 일상적 상호작용에 물질적으로 안정된 형태를 부여한다. 게다가, 도시건축은 인간이 주변 환경을 어떻게 인식하고, 해석하고, 가치를 매기는지를 결정한다. 도시건축은 삶의 맥락을 진부하게 만들고, 불만을 유발하며, 자연을 파괴하는 소비적인 삶으로 이어질 수 있다. 반대로, 그것은 웰빙을 촉진하고, 공동체의 정체성을 강화하며, 역사적 유산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자연에 대한 존중을 촉진할 수 있다. 한마디로 한 시대의 도시건축은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살아가는 공간을 구체화하고 나아가 인간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도시 건축이 이처럼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때 자연으로부터 재료를 동원하는 시대의 첨단 과학기술을 활용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우리 자신이 살고 있는 방식을 결정하는 우리의 도시, 특히 서울은 10여년전 서울로 여행 온 이방인들로부터 어떤 도시인지 평가를 받은 적이 있다. 세계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여행 전문지 론리플래닛은 그 이방인들의 평가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여기저기로 무질서하게 뻗은 도로들, 소비에트 스타일의 콘크리트 아파트 건물들, 심각한 오염, 영혼도 (뜨거운) 마음도 없다. 숨 막히는 단조로움이 사람들을 알코올 의존증으로 몰고 있다.”
10여년전 우리 서울로 자신을 찾기 위한 고귀한 학문인 여행을 온 이방인들에게 서울은 영혼이 없는 풍경이었다.
물론 그 후 10여년이 지났다. 그동안 서울은 변했다. 여전히 엄청나게 밀집된 초고층 콘크리트 아파트가 더욱 밀집된 형태로 지어지곤 있지만, 동대문 DDP와 같이 소비에트 스타일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지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서울의 랜드마크가 되어 당당하게 현란한 형태미를 과시하고 있다. 이제 서울은 영혼이 있는 도시가 되었을까?
우리는 고귀한 학문으로서의 여행을 떠나려 한다. 그러나 그러한 여행을 떠나려면 시간을 갖고 여러가지를 생각해보는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우선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서울의 풍경을 그 이전과는 달리 새롭게 변신시키려 한 그 랜드마크를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여행을 준비하도록 하자.
필자: 이종관
성균관대 철학과 교수. 성균관대 하이브리드 미래문화연구소 소장. 미래인문학 주임교수. 첨단과학기술과 관련된 도시, 경제, 문화 예술 문제를 젊은 연구원들과 함께 미래인문학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주요저서: 포스트휴먼이 온다. 공간의 현상학, 건축, 그리고 풍경. 사이버문화와 예술의 유혹. 디지털 철학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