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y 26, 2023 최진석 사회-문화, 칼럼, 코리아
단재 신채호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 이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이제 철학(생각)을 수입하는 나라의 한계를 벗어나야 한다. 생각이나 사유의 결과들을 수입해서 살았던 습관을 이겨내고, 스스로 사유의 생산자가 되는 길을 열어야 한다. 사유의 결과를 배우는 단계를 넘어서서 사유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생각한 결과들을 숙지하는 것으로만 자기 삶을 채우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전파하고, 대신해주는 삶밖에 살 수 없다. 이는 종속적인 삶이다. 종속적인 삶을 살아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가 바로 중진국 정도다.
이미 중진국 수준에는 높은 단계로 도달했으니 이제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문을 열어야 한다. 사유의 수용자가 아니라 생산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철학적이고 문화적인 시선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뜻도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단계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진정한 이유다.
이 대목에서 독립운동가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이 1925년 1월 <동아일보>에 발표한 “낭객의 신년만필”이라는 글을 본다.
이해 문제를 위하여 석가도 나고, 공자도 나고, 예수도 나고, 마르크스도 나고, 크로포트킨도 났다. 시대와 경우가 같지 않으므로 그들의 감정의 충동도 같지 않아 그 이해 표준의 대소 광협은 있을망정 이해는 이해이다. 그의 제자들도 본사(本師)의 정의(精義)를 잘 이해하여 자가의 리(利)를 구하므로 중국의 석가가 인도와 다르며 일본의 공자가 중국과는 다르며, 마르크스도 카우츠키의 마르크스와 레닌의 마르크스와 중국이나 일본의 마르크스가 다름이다.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 이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주의와 도덕은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
신채호 선생은 식민성을 비주체성 혹은 비독립성과 직접 연관시켰다. 외부의 생각이 우리에게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면 우리는 이미 주인이 아니다. 우리의 생각이 우리에게서 생산될 때라야 우리는 비로소 스스로 주인이 된다. 스스로 사유하지 않은 채 사유의 결과들을 받아들이기만 하고 그 사유의 전도사로 살면, 그것이 바로 노예의 삶이다. 철학적 단계로 사유를 상승시키면 노예적 삶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독립을 이룰 수 있다.
철학을 이야기하면서 선진국, 후진국을 이야기하고 국가 발전과 연결시키니까 이게 정말 철학인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특히 그렇다. 그런데 나는 지금 철학의 내용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철학적인 사유의 높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드린다.
‘이 세계의 어떤 것도 현실이 아닌 것은 없다’는 사실, 그것을 알리고 싶다. 우리가 철학이라는 관념으로 포착한 그 차원의 사유도 현실을 포착한 것이지 관념 자체의 구조가 아니란 뜻이다. 추상적인 이론만 붙들고 있는 것을 철학하는 것으로 착각한다면, 이것 자체가 매우 비철학적이다. 철학을 하는 것은 높은 수준에서 생각할 줄 아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의 대상은 당장의 현실 세계다. 따라서 철학적인 태도를 가지면 당연히 당장의 현실 세계를 읽게 된다. 사유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사유하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철학하는 일이란 남이 이미 읽어낸 세계의 내용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읽을 줄 아는 힘을 갖는 일이다. 이 점을 꼭 기억해야 한다.
August 1, 2023 최진석 사회-문화, 아시아, 칼럼, 코리아
“모든 삶은 생존 이상을 향해 건너가려는 몸부림이다. 자기를 제한하며 멈추게 하는 울타리를 넘으려는 꿈은 모든 생명체들의 당연한 생명활동이다. 언제부턴가 몰리는 한참이나 “울타리 너머를 바라보”곤 했다. 생명체는 언제나 울타리 너머를 포기하지 못한다.”(본문 중에서) 사진은 중국 북경 자금성 담장
존재하는 것들은 대개 스스로 무너진다. 내부에서 폭동이 일어나는 일이나 파산하는 일이나 그런 무너짐들은 자세히 따져보면 대부분 자초한 결과다. 누구도 자기가 아닌 것에 의해서 무너지기는 어렵다.
동물들이 어떻게 인간의 자리를 넘볼 수나 있었겠는가. 주위의 어떤 농장들에서도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존즈씨의 메이너 농장만은 예외였다. 이미 존즈씨 스스로 무너졌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조지 오웰은 스스로 무너진 존즈씨의 모습을 제일 먼저 묘사했을 것이다. “과거의 존즈씨는 비록 모진 주인이기는 했어도 유능한 농사꾼이었는데”, “무슨 소송을 냈다가 지는 바람에 돈을 날리고 잔뜩 울적해져서 몸 생각은 않고 매일 술타령이었다.” 그의 삶은 “갈짓자 걸음”처럼 비틀거렸고, “좌우로 크게 출렁거렸다.”
존즈씨가 이렇게 스스로 무너져가면서 “미리 짜둔 각본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존즈씨는 어느 날 갑자기 반란은 성공했고, ‘메이너 농장’은 ‘동물농장’으로 바뀌었다. 인간들을 쫓아내고 해방감에 젖은 동물들은 “처소로 돌아가 잠자리에 들었다.” 혁명의 성공이 준 첫 소득은 아마도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편안한 잠”이었을 것이다.
혁명의 칼자루는 돼지들이 잡았다. 이유는 단 하나, 읽고 쓸 줄 알기 때문이다. 읽기와 쓰기로 성장한 힘이야말로 지배력의 근원이다. 읽기와 쓰기의 밭에서 자라지 못하면 누구나 무지하다. 부처에게 가는 길도 그 시작은 경을 읽는 것이다. 독재자는 제 맘대로 읽고 쓴다. 무지한 대중들은 독재자가 읽기와 쓰기에 제멋대로 손을 대도 괜찮다. 자유를 빼앗아가는 수퇘지 독재자에게도 대중들은 “나폴레옹 동무가 옳다고 하면 옳은 거야!”, “나폴레옹은 언제나 옳다”는 맹목적 ‘충성과 복종’을 바친다.
무지해서 그렇다. 무지하면 우선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생각을 포기한 채 사는 무지한 대중은 쉽게 조종당한다. 독재자 옆에는 언제나 무지한 대중을 조종하는 전문가들이 대놓고 활동한다. 어용 지식인과 어용 예술인이다.
<동물농장>에서는 스퀼러와 미니무스가 그 역할을 했다. 어떤 자들은 당당하게 어용 지식인을 자처하기까지 한다. 독재자의 입이 되는 시인도 있다. 어용 지식인들의 전문가적 권위와 예술인들의 수준 높은 언어 구사력은 대중들로 하여금 조종당하면서도 그렇지 않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맹목적 추종은 더 공고해진다.
읽기와 쓰기는 말로 재현된다.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이다. 독재자들은 대개 말의 질서와 신뢰를 무너뜨린다. 그들은 독재를 거짓말로 시작한다. 대개 독재자는 자기가 한 말을 지키지 않는다. 인간이라면 말을 어그러뜨리고 나서 반드시 수치심을 느낀다. 염치가 있고 수치심을 안다면 혁명 정신을 망가뜨려 독재자가 되지는 않는다.
“‘동물농장’은 다시 ‘메이너 농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마지막에는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편안한 잠”은 반란을 성공시킨 그 날 한 번 뿐이었다. 그들 모두의 내면은 사실 지적으로 매우 부실했던 것이다. 튼튼한 내면은 “우둔한” 몰리에게만 있었다.”(본문 중에서) 사진은 조제 오웰의 <동물농장> 표지
한편 무지한 대중들은 독재자가 거짓말을 해도 상관하지 않는다. “나폴레옹은 언제나 옳다”라며 맹목적으로 복종하는데, 자기 영혼을 이미 헌납했기 때문이다. 무지가 독재의 토양이다. 무지는 스스로를 무너뜨린다.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불이 넘어도 무지하면 전체주의 독재를 자초한다.
늙은 수퇘지 혁명가 메이저는 “굶주림과 회초리에서 벗어난 동물들의 사회, 모든 동물이 평등하고 모두가 자기 능력에 따라 일하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인간에 맞서 싸우는 데엔 우리 동물들이 결코 인간을 닮아서는 안 된다는 점도 기억하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죽는다.
혁명의 깃발을 든 자 메이저는 혁명이 완성되려면 동물들의 기본 정신과 자세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간파하였다. 그러나 메이저를 계승한다는 수퇘지들 가운데 그의 말에 담긴 정신을 계승한 돼지는 없었다.
독재자들은 대개 앞선 영웅들로부터 그 정신이 아니라 이미지만 끌어와서 임의로 소비하다가 결국 특권의식과 권력놀이에 빠져 완장으로 전락한다. 염치와 수치심을 기반으로 한 성숙을 추구하지 않으면 특권을 누리고 권력을 휘두르는 일 이상은 할 줄 모른다. 깃발을 찢어 완장을 만드는 일, 그것이 전부이다.
반성 능력이 없고 착하기만 하면 복서처럼 된다. 독재자가 야기한 비효율을 감내하며, 독재자 “나폴레옹은 언제나 옳고”, “내가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다짐을 하지만, 이 다짐으로 권력자 돼지들은 더 특권화 될 뿐이다.
충직한 말인 복서의 말로를 보지 않았는가. 복서는 나폴레옹을 따르며 자기가 조금이라도 더 일하면 모든 동물이 평등해지는 이상사회를 건설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말 도살업자에게 넘겨져 독재자들의 위스키 한 상자로 돌아와 소비될 뿐이다. 위스키 한 상자로 소비된 복서는 홍위병들처럼 독재의 소모품이 되는 말로를 맞이했지만 끝까지 무지했으며 언제나 당당하고 헌신적이었다.
독재자들이 튼튼하게 쌓은 전체주의적 둑에도 조그만 구멍은 생기게 마련이다.호주머니를 뚫고 나오려는 송곳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라면 품고 있을 것이 분명한 생명의 부싯돌이다. 포기할 수 없는 그것 때문에 깃발이 완장으로 전락한 혁명의 남루한 대오에서 누구는 용기를 내어 이탈한다. 그것은 자유다. 그것은 개성이다.
반란을 준비하며 대오를 갖춰가던 때에 돌부리처럼 튀어나오는 동물이 있었으니, “제일 우둔한” 질문을 던진 “흰 말 몰리였다.” 반란 지도자 스노볼에게 몰리는 “반란 이후에도 설탕이 있을”지를 묻는다. 스노볼은 단호하게 “아뇨”라고 대답한다. 스노볼은 또 말한다. “당신한테 꼭 설탕이 필요한 것도 아니잖소? 귀리와 건초는 당신이 얼마든지 먹고 싶은 대로 먹게 될 거요.”
몰리는 또 묻는다. “그때 가서도 내가 갈기에 댕기를 매고 다닐 수 있을까요?” 스노볼은 몰리를 비웃으며 댕기는 노예의 표시라고 일축하며 매서는 안 될 것임을 분명히 한다. 귀리나 건초와 달리 설탕이나 댕기는 생존을 돕는 직접적인 것들이 아니다.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니며, 생존 너머에 있는 것이다. 생존 너머의 것은 생존을 생존 이상으로 끌어올린다.
삶은 생존 너머에 있는 나만의 환상을 좇으면서 진실해진다. 각자의 삶은 여기서 차이가 난다. 그러므로 전체주의적 독재자들은 언제나 이 생존 이상의 것들을 제거하려 한다. 동물농장에서도 그랬다. 그러나 몰리를 몰리이게 하는 것은 어떤 말이나 먹는 건초나 귀리가 아니다. 노예의 표시라는 댕기가 오히려 몰리를 몰리이게 해준다.
모든 삶은 생존 이상을 향해 건너가려는 몸부림이다. 자기를 제한하며 멈추게 하는 울타리를 넘으려는 꿈은 모든 생명체들의 당연한 생명활동이다. 언제부턴가 몰리는 한참이나 “울타리 너머를 바라보”곤 했다. 생명체는 언제나 울타리 너머를 포기하지 못한다.
몰리의 ‘울타리 너머’는 설탕이고 댕기였다. 몰리는 선동에 쉽게 휩쓸리는 간교함이 아니라, 단순하지만 진실한 자기만의 고유한 활동성을 우둔함 속에 묻어둔 말이었다. 몰리의 “짚단 밑에는 각설탕 덩어리들과 형형색색의 댕기다발들이 여러 개 숨겨져 있었다.” 혁명의 질서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우둔한” 몰리는 마침내 혁명의 대오를 이탈해 “사라졌다.” 몰리는 마을로 내려가 “앞머리에 분홍색 댕기를 달고” 술집 주인같이 생긴 남자의 마차를 끄는 삶을 시작했다.
혁명 주도 세력의 눈에는 다시 인간에 종속되는 노예적 삶으로의 회귀였지만 몰리는 “썩 기분이 좋아 보였다”고 한다. 자신의 삶을 혁명의 이념에 종속시키지 않고, 댕기라고 하는 자신만의 욕망과 개성을 포기하지 않은 몰리는 자유를 찾았다. 자기가 자기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혁명에서 태어난 전체주의 독재자들이 몰리에게 좀 더 진실한 관심을 보인다면, 무능하고 고집스러운 독재자로 전락하지 않을 길이 보일 것이다.
함석헌 선생은 혁명이 혁명으로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를 혁명가 자신이 혁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혁명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니체의 한 마디도 떠오른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존즈씨의 독재를 타도하고 모두가 평등한 동물들의 이상사회를 세우겠다며 권력을 잡은 돼지들은 스스로 괴물이 되어갔다. 읽기와 쓰기를 할 수 있었을 뿐, 염치와 수치심을 모르는 부실한 내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특권층이 된 돼지들은 평등한 세상을 완성하기 위해 정한 헌법과도 같은 일곱 계명에도 손을 댄다.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는 계명은 “어떤 동물도 시트를 갈고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로 바꾼다. “어떤 동물도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계명은 “어떤 동물도 지나치게 술을 마시면 안 된다”로 바꾼다. 이미 특권층이 된 돼지들을 위해서였다. 일곱 계명 가운데 제대로 남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인간들의 특권을 타파하자던 돼지들이 결국은 자신들의 특권을 정당화하는 데 몰두하게 되었다. 사실 각성 없는 혁명가들이 일으킨 대부분의 혁명이 다 이렇게 되기는 한다.
말(言)을 무너뜨리는 자들에게서는 염치와 수치심도 없어진다. 염치가 없어야 특권도 만들 수 있다. 돼지들은 몰리의 댕기를 노예의 상징이라며 금지하더니 “모든 돼지는 등급에 상관없이 일요일에 녹색 댕기를 꼬리에 매달 특권을 갖는다는 규칙”까지 만드는 지경이 된다.
어용 지식인 스퀼러는 혁명 초기에 “두 발은 나쁘고 네 발은 좋다”는 구호를 그렇게도 강하게 외치면서 인간적인 모든 것과 싸웠지만 결국은 자신도 인간을 닮으려 애쓴다. 이제는 인간화가 바로 특권이다. “돼지 하나가 두 발로 서서 걷고 있었다. 스퀼러였다.”
‘동물농장’은 다시 ‘메이너 농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마지막에는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편안한 잠”은 반란을 성공시킨 그 날 한 번 뿐이었다. 그들 모두의 내면은 사실 지적으로 매우 부실했던 것이다. 튼튼한 내면은 “우둔한” 몰리에게만 있었다.
August 15, 2023 최진석 1. 한반도, 뉴스, 정치, 칼럼
진영에 갇힌 자들은 협치를 할 수 없다. 포용력을 갖는 것도 불가능하다. 협치나 포용은 협치나 포용을 하는 주체에 틈이 나있고 여백이 있어야 가능하다. 틈이나 여백이 없다면, 다른 대립면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틈이 없는데 어떻게 대립면이 뚫고 들어올 수 있겠는가?
<성경>을 백번 읽은 사람과 한번만 읽은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백번 읽은 사람은 불자들과도 평화롭게 지낸다. 그러나 한번만 읽은 사람은 불자들을 쉽게 적대시한다. <반야심경>을 한번만 읽은 사람과 백번 읽은 사람 사이에도 큰 차이가 있다. 백번 읽은 사람은 기독교인과도 잘 지내지만, 한번만 읽은 사람은 기독교인을 적대시한다.
제일 무서운 사람이 책을 한권 혹은 한번만 읽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은 항상 과감하다. 책을 한권만 읽은 사람은 헛똑똑이가 되어 생각하는 능력이 없다.
생각 없는 사람이 제일 무섭고 가엾다. 중국의 홍위병들을 생각해보라. 한쪽을 선택하여 거기에 자신을 맡긴 자들은 생각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진영에 빠진 자들이다. 진영에서 시킨 대로만 할 줄 알지 자신의 독립적 사유 능력은 거세된다.
대립면의 상호의존을 의식하는 자들은 숙고하는 버릇을 가질 수밖에 없다.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악의 근원은 무지하여 사유하지 않는다.
유무상생有無相生으로 표현되는 대립면의 공존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어느 한쪽을 선택한다. 물론 누구나 결국에는 선택하는 일이 생긴다. 그러나 그 선택이 깊은 사유에서 나왔으냐, 아니면 아무런 사유없이 나왔느냐에 따라 그 성숙도와 설득력이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진영에 갇혀 별 생각 없이 한쪽을 선택하여 고착시킨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잔인한 폭력을 행사하는지 의식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양심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대립면의 상호의존이라는 인식을 가지면, 진영 논리에 빠져서 그 진영의 논리를 상대방에게도 쉽게 강요하는 일이 적어진다.
대립면의 상호의존이라는 원칙을 적용하여 유무상생을 보면, ‘유有’가 ‘유有’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무無’와 관계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유’의 존재적 테두리가 매우 느슨하거나 흐리거나 그 자체에 틈이 존재하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 물론 ‘무’도 마찬가지다. 느슨하거나 흐리거나 그 자체에 틈이 있어야 대립면을 받아들이고 허용하여 상호의존할 수 있게 된다.
진영에 갇힌 자들은 협치를 할 수 없다. 포용력을 갖는 것도 불가능하다. 협치나 포용은, 협치나 포용을 하는 주체에 틈이 나있고 여백이 있어야 가능하다. 틈이나 여백이 없다면, 다른 대립면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틈이 없는데 어떻게 대립면이 뚫고 들어올 수 있겠는가?
여기서 틈은 존재의 균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립면을 받아들일 가능성으로서의 여백 정도다. 진영에 갇혀 상대방에게 쉽게 프레임을 씌울 경우엔 어떤 여백도 존재하지 못한다. 틈이 없어진다.
틈과 여백이 없으면 거기서 어떤 감동도 생기지 못한다. 감동이 없으면 논리로 무장한 살벌한 비난만 남는다. 지금 우리 사회가 처한 상황이다. 조선시대 당쟁이나, 진영에 빠져 서로 비난만 일삼는 지금의 상황이나 다를 바가 없다. 공자의 정명론正名論처럼 개념을 바르게 정하여 사용하자는 말은 어떤 개념도 여백과 틈을 주지 말자는 것과 다름없다.
(도덕경의)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은 개념을 여백이나 틈 없이 사용해서 세계의 진실을 담을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세계는 서로 여백을 나누며 틈을 허용하는 것 아닐까? 바로 유무상생有無相生인 거다.
필자는 보통 사람들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시인은 언어를 지배한다고 생각한다. 시인은 언어를 재배치하고, 위치를 다르게 하며, 개념과 개념 사이에 틈과 여백을 남긴다. 그 틈과 여백 사이에 소리를 심는다. 언어들 사이의 남겨진 틈과 여백들이 소리를 입은 개념들에 탄력을 주어 드러나지 않거나 아직 없는 진실들을 튀어 오르게 한다.
소설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동이 생산되는 것이다. 시인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재배치하고 부리면서 거기에 틈을 만들고 그 틈 사이에 소리를 입혀서 탄력있는 감동을 만들어낸다. 협치나 포용이나 하는 것들은 배척이나 편 가르기에 비해 얼마나 큰 감동을 주는지? 또 얼마나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는지? 다 여백과 틈에서 빚어진 감동이다.